제36회 한국영상기자상 수상소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속 음악으로 만난 평화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 중 하나로 꼽히는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열리는 가장 권위 있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입니다. 대회에 출전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피아니스트들이 예선 때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며 마치 ‘음악을 통한 대리전’처럼 클래식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사전에 감지한 취재진은 음악 국가대항전 같은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이들의 순수한 음악적 경쟁 과정을 통해 음악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고찰하고, 냉전 시대부터 평화의 매개 역할을 했던 밴 클라이번 콩쿠르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짚어보며 과거에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 현재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시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이번 취재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임윤찬, 신창용, 박진형 등 국내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고 피아니스트들의 혼이 담긴 연주와 그들의 경쟁을 직접 영상으로 담을 생각에 즐겁기만 했습니다. 여러 피아노 콩쿠르 영상, 피아노 관련 영화, 유튜브 등 참고할 만한 것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영화를 보며 대중 앞에서 멋지게 피아노 연주를 뽐내고 싶단 생각도 했었고, 피아노를 치며 고백하는 귀여운 상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영상미학적으로 정말 완성도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즐겁게 피아노 영상들을 찾아보던 중 선배가 던진 말이 저를 고민에 빠트렸습니다. “음악은 있는데 전쟁이 없네”. 그때부터 막막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과연 어떻게 프로그램 주제의식을 영상으로 표현할 것인가. 우크라이나 참가자를 데리고 전쟁터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연히 경연장에 전쟁 관련 영상을 띄울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피아노를 가지고 전쟁터로 가자는 농담도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피아노 콩쿠르 영상만 주구장창 담아와 반쪽자리 기획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당사자인 연주자들에게 경연 기간 중 예민한 질문을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까다로웠습니다. 콩쿠르 주최 측은 참가자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습니다. 경연 기간 동안 전쟁에 관한 질문을 언제 할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들이 콩쿠르 참가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정확히 헤아릴 순 없지만, 백스테이지에서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을 가까이 마주하니 조금은 알 것 같아 더욱 조심스러웠습니다.
매 라운드마다 탈락자가 발생하는 경연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연주자가 탈락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인터뷰할 기회가 생겨도 무리하게 질문을 하기보단 친밀감을 쌓으려 노력했고 그들의 연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연주자와 가까워질수록 다양하게 촬영할 기회들이 생겼습니다. 포트워스 현지에서 머무는 집에 찾아가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일상까지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콩쿠르가 진행될수록 취재진도 경연에 참가하는 연주자들의 마음처럼 초조해졌습니다. 경연이 끝나면 모든 질문을 쏟아붓겠다는 다짐을 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며 다양한 기법으로 차곡차곡 영상들을 쌓아나갔습니다.
전쟁 당사자들의 목소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걸 담아내는 표현기법이었습니다. 피아노 콩쿠르라는 것이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었고 전쟁까지 녹여내야 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재미있게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빔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전쟁 상황을 영상에 담아 피아노에 투사함으로써 전쟁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관념들을 한 장소에서 시각화했습니다. 미니어처, 고속촬영, 타임랩스, 짐벌 등 할 수 있는 영상기법을 총동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의 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한 음표 모양의 ‘보케필터’입니다. 렌즈 구경에 정확히 맞도록 제작한 아주 정교한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영상기법들이 시청자 입장에서 ‘과유불급’, ‘불필요한 영상기법들의 대잔치’, ‘영상적 인플레이션’이 되지 않도록 후반작업에서는 최대한 자제하면서 담백하게 편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프로그램 특성상 초기 기획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참가자들이 실제 경연에서 탈락하면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대상들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보도였습니다. 이러한 리스크를 알면서도 미국 포트워스로 취재를 간 것은 음악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강력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콩쿠르 참가자들이 저희 취재진들과 함께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 내려갔던 셈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우크라이나 참가자였던 드미트로 쵸니가 3등, 러시아 참가자였던 안나 게니쉬네가 2등, 그리고 대한민국의 임윤찬이 1등을 차지했고 이들의 우정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기에 운 좋게도 기획 의도를 잘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한국영상기자상 수상으로 기적과 같은 3주를 보낸 2022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주간 함께 동고동락한 이재섭, 정연욱 두 선배께 감사드리며 어디선가 전쟁을 겪고 있을 모두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재섭, 류재현 (글)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