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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 전범자와 정치인의 역사인식 (3)



아소 가계, 1000년의 조선 국유림을 왜 파괴했는가



사진 1.jpg

아소 타로(麻生太郎) 일본 자민당 부총재

출처 : 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 사진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에 독산녹화(禿山録化)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동안 벌목이 금지됐던 국유림이 민간기업에 매각되어 귀중한 자원이 수탈되었다. ‘아소 상점은 조선에서 이익을 얻은 기업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부터 1000년간 국유림으로 궁궐과 군에 목재를 공급해 온 안면도(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의 산림(사진1)은 세계적으로 드물 정도로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관리돼 왔다.


사진2.png

당시 안면도의 임상, <사진 출처 안면도’(1933년 발행)>

 

 소나무가 많고 운송이 편리한 안면도는 조선왕조시대 초기부터 전함과 조운선을 만드는 목재 공급지로서 수군이 직접 관리했다. 목재자원 조성 정책도 적극적으로 실시됐다. 조선왕조시대의 법규 경국대전에는 매년 봄에 소나무 식림을 파종하여 기르고 몇 그루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수를 연말에 국왕에게 보고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현장 직원은 처벌한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나라가 궁정에 필요한 목재를 얻기 위해 벌목을 금지해 온 봉산의 대부분이 국유림으로 바뀌었고 권력기구인 조선총독부가 이익을 얻는 것과 처분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안면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소 상점이 안면도 매수

 국립산림과학원 배재수 원장은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국유림을 매각하려고 조선임정계획을 세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봉산안면도를 매각 처분했다.”고 말했다.

 

 조선임정계획은 국유림경영기관 개혁에 의한 경영 강화와 나라 이외의 것을 소유하는 산림인 민유림에 관한 행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민유림정 충실(民有林政充實)’민유림 지도 방침 대강의 목적으로 1926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국가가 국토 보안 및 산림경영을 위해 국가 소유로 보존할 필요가 있는 요존 국유림(要存國有林)’ 531만 정보 가운데 민간에 개방하는 것이 유리한 농경지·임업경영지의 약 131만 정보를 요존 국유림에서 제외했다. 그중, 100만 정보의 임업 경영지를 조림 대부(후에 양여, 30만 정보)와 매각 처분(70만 정보)으로 구분했다.

 

 이후 안면도는 매각 처분되었다. 그리고 그 산림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수한 것이 아소상점이었다. 아소상점은 아소타로 자민당 부총재가 사장을 역임한 ()아소시멘트의 전신 기업이다.

 

 아소시멘트가 19754월에 발행한 아소 백년사에는 소와(일본의 연호) 초 당시 조선총독부가 안면도 산림을 개방하고 민간에게 개척하도록 했을 때 아소 타키치(麻生 太吉)가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동 섬(안면도)의 총면적 9천 정보 가운데 (산림을 이루고 있는) 성림지 6천 정보를 823천 엔에 매수하는 데 성공하고 19273월 안면도 임업소를 개설했다. 다음 해 9월 안면도 승산리에 사무소, 강 건너 대나무 기슭에 출장소를 각각 두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초대 소장에는 크리스천이면서 도민을 잘 알고 있는 하야시 쇼조(林 省三)가 기용되었다. 그는 저서 안면도’(1933년 발행)에서 안면도 입찰에 참가한 기업 가운데 마지막까지 경쟁한 회사는 아소상점과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일대일 경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동척은 1925년에 발생한 전라남도 나주군 궁삼면 토지 수탈사건과 관계가 있어 조선인에게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의 대표적인 국책회사인 동척아소상점이 마지막까지 경쟁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안면도를 매수한 아소상점은 연간 벌목 총량 약 8만 척을 토목 자재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아소 타로(麻生太郎) 부총재의 증조부 아소 타키치(麻生太吉)아소 백년사에서 안면도의 매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안면도의 토질은 소나무에 적합하고 전 섬 대부분이 적송 밀림이다. 12천만부터 13천만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도저히 내지(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것뿐이다. (타키치)가 이 섬에 눈독을 들인 것은 나의 광산에 사용할 갱목이 연간 40만 엔에서 50만 엔 (비용)이 들어가는 데 거기에 이 섬이 있으면 당분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소상점은 당장 제작소를 설치해 소나무를 베고 싶었던 것이다.

 

 동년사에는 동 섬에는 유리의 원료인 규사가 다량으로 산출하므로 이 방면에 힘을 쏟았으며 안면도 임업소는 그 이름처럼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의 아소 왕국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안면도민의 분노와 비난 

 조선왕조시대 때 봉산으로 지정된 안면도와 황해남도의 장산곶, 전라북도의 변산반도가 일본의 기업에 매각되자, 이에 조선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사진3.png

동아일보 (1927330)


 1927330일 동아일보(자료1)의 기사에는 서해의 극락도라고 하는 안면도는 본래 왕궁의 관곽재(죽었을 때 사용하는 관의 목재)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총면적이 630 정보의 큰 섬으로 수목이 창련 하고 경치가 비옥한 데다 노루와 사슴, 두루미와 같은 회귀한 새들이 솔가지에 깃들어 그 안에 사는 8천 명의 주민은 누워 자면서 먹고 산다는 섬이었다.”총독부에서 안면도의 산림을 매각하게 되어 입찰한 결과, 아소상점의 아소 타키치 씨에게 823천 원()에 낙찰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섬은 형식으로는 삼림지역만 낙찰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섬은 대부분 삼림지대이지만 약간의 민유지의 경작지도 있었다사실상 아소 씨가 매수하여 이 섬의 왕이 되다시피 되었다고 빍히고 있다. 특히 아소 씨는 일본인 이민을 모집하여 이주하게 한 후 제재소를 설립하여 채벌하게 하고 유리 만드는 원료 사암을 채굴한다고 하여 당시 조선인들은 안면도가 아소상점에 매각되었을 때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진4.png

당시 목재를 일본으로 운송하는 모습 <사진 출처 안면도’(1933년 발행)>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산리의 도민 박병태 씨(당시 85)임업소의 초대 소장 하야시 쇼조(林省三) 씨의 능란한 설득으로 도민들은 섬의 나무들을 소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소상점은 큰 나무를 벌채하여 목재를 배에 실어 인천, 군산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운반(사진2)하는 것을 보고 지식층들은 이를 비난하고 극렬히 반대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안면도민으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에 살던 오문환 씨(당시 84)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17세이던 1939년부터 해방까지 아소상점이 운영하던 안면도 임업소에서 송진 채취 작업을 했다.

 

사진5.png

오문환 씨가 안면도 휴양림 (당시 안면도 임업소)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

 

 오 씨는 안면도에 있는 우거진 소나무에 당시 송진을 채취한 적이 있는 나무를 찾아냈다(사진3). 소나무 줄기에는 아소 상점이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톱질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월과 함께 잊혀 가던 안면도의 기억을 되살린 오 씨는 당시 아소 상점에서 일한 하루의 일당은 70~80전 정도였다그것은 5일간 일해야 쌀 한 말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양으로는 혼자밖에 연명할 수 없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김영희 전 안면도 휴양림 소장(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정당리당시 70)은 일제강점기에 아소 상점이 안면도에서 송진을 채취한 실태를 알기 위해 최종석 씨를 만났다고 했다.

 

 최 씨는 1940년부터 45년까지 이 임업소에서 송진 채취 인부로 일했다. 그는 김 씨에게 안면도 성림지 6000 정보 내에 300명 이상이 들어가서 하루 한 사람당 소나무 200그루 정도 송진을 채취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송진은 일본의 군수품으로, 벌목한 소나무는 탄광 갱목으로 사용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수난 이후 안면도는 국민에게 잊혀지고 노령수의 우량목이 수북이 우거진 과거의 나무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의 자랑할 만한 것의 하나로 봉산을 식림에서 녹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안면도를 비롯한 귀중한 산림이 민간 기업에 매각돼 그 자원이 약탈당한 사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리고 약탈을 자행한 기업들은 그 책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사의 과오는 평생 남아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요존국유림 국가소유로 보존필요가 있는 산림

☞ 조림대부 국유림 조림 목적으로 민간에게 대부하는 것.


한 원 상 (한국영상기자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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