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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밖에서] - 영화 추천

내가 사랑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SBS 김남성 (1).png

 극장으로 가는 발걸음에 묘한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영화를 보러 가며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마치 오래전 첫사랑을 재회하듯, 기대감과 실망감 언저리의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전날 숙취와 복잡하게 얽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2003년 개봉했던 ‘냉정과 열정사이’가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영화 속 준세이가 느꼈을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개봉한 지 20년 된 영화가 다시 스크린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도 ‘헐리웃 시리즈물’이나 ‘천만관객’등의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일본감독의 멜로 영화’가.

 윽고 영화가 시작됐다. 나직이 짤막한 주인공들의 대화. 그리고 피렌체의 전경과 함께 울려 퍼지는 OST 타이틀곡 ‘The Whole Nine Yards’.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훅 하고 화끈거림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얼굴을 손으로 가려본다. (부끄럽게도) 눈에서 땀도 조금 났던 것 같다. 무슨 감정이었을까.

 영화 속 아오이와 준세이는 그때 그대로인데, 나는 어느새 40대가 되어 있었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처음 봤던 건 스무 살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서툰 학교생활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 정돈되지 못하고 갈곳 없이 방황하는 열정들. 그때의 나 역시도 그랬다. 어설프지만 반짝거리던 날들이었다.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연례행사처럼 가끔씩 이 영화를 꺼내보곤 했지만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영화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느꼈던 감정들이 바스러져 갈 즈음 재개봉 소식이 전해졌다.극장에서 20년 만에 마주한 냉정과 열정사이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매끈한 디지털영상에 적응된 눈앞에 펼쳐진 색바랜 피렌체 풍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유화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이해되지 않던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와 극적 장치들이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단지 나이를 먹어서일까. 지난 시간만큼 나의 경험이 늘어난 탓일까. 주인공들의 굵은 감정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마빈과 메미의 감정, 조반나의 알 수 없는 행동과 이 영화가 왜 하필 피렌체와 유화 복원을 소재로 삼았는지.

 준세이가 치골리의 유화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복원해 가듯, 나는 오래전의 나를 복원해 나갔다. 스무살의 나를, 나는 영화를 통해 재회한 것이다.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영화는 점점 멀어져갔다. 고요한 암흑에 엔딩 크레딧까지 끝나자 마침내 재회의 시간이 끝났다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관람객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까? 아무도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영화와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밀도 높은 열일곱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OST는 영화의 장면들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하는데, 특히 음대생이 연주하던 동명의 곡 ‘냉정과 열정사이’의 첼로 선율은 복원되어가는 유화처럼 이 영화의 메세지를 깊게 전달한다. 차분한 기타 선율에 바이올린과 첼로가 대화하듯 교차하는 ‘History’ 그리고 재회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End Title까지. 열일곱 개의 곡이 마치 하나의 곡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피렌체에 가게 되면 이 음악들을 들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영화 속 장소들을 거닐어 보고 싶다.

 영화는 나와 작품 사이에 수많은 우주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 편의 영화는 거대한 태양과도 같다. 매일 뜨는 태양이 한번도 똑같은 적이 없는 것처럼 영화 역시 보는 사람마다,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남긴다. 훗날 오늘의 감정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흐르는 시간이 가슴 아픈 건 풍화되어 사라지는 감정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찰나의 순간과 감정들이 까마득하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무언가를 기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해본다. 이런 작품을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자 행복인지.

 오늘 다시 만난 냉정과 열정사이를 통해 냉철한 40대의 삶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20대의 젊은 날 들을 회상해 본다. 무미건조해지지 않기 위해, 메마르지 않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이 영화를 만나고, 헤어져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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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성 / SBS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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