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자들이 매일 마주하는 취재 현장은 시각적 충격과 신체적 위협, 그리고 고강도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쉴 새 없이 축적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들이 기록한 진실의 무게만큼 영상기자들의 가슴에 생긴 상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온 게 현실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회장 최연송)는 서강대 레메디아 연구단(단장 조재희 교수)과 공동으로 5월 16릴 광주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광주민주포럼 공동 세미나 '분쟁지역 영상저널리스트의 기록과 상처'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는 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영상기자들의 정신 건강 실태를 집중 조명하고, 나아가 이긓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적 인정'의 가치와 공적 치유 체계 구축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편집자 주2026 광주민주포럼에 참석한 발제자들과 영상기자들, 한국영상기자협회 임원진의 기념촬영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조재희 교수(서강대 미디어엔터테인먼트학과)는 한국 영상기자들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고강도 트라우마의 실태를 공개했다. 조재희 교수 연구팀은 영상기자들이 직무 중 맞닥뜨리는 직접적 사건 유형 9가지와 취재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목격하게 되 는 취재 사건 유형 14가지 등 총 23가지의 세부 위험 유형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영상기자 75.6%가 고강도 위험 상시 노출…현장 취재 누적이 ‘번아웃’으로 직결 한국영상기자협회 소속 회원 119명의 영상기자를 대상으로 지난 4월 6일부터 24일까지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무려 75.6%가 연구팀이 제시한 23개 위험 유형 중 7가지 이상을 직접 경험했고, 조사 대상 기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위험 사건은 평균 무려 10.1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를 위험 노출 구간별로 세분화해 살펴보면, 23개 유형 중 7개에서 11개 사이의 위험 사건을 경험한 기자가 41명으로 전체의 34.4%를 차지했고, 12개에서 16개 사이의 사건을 경험한 기자도 36명(30.3%)에 육박했다. 17개 이상 경험했다고 응답한 기자도 13명(8.4%)이나 됐다. 조 교수는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현장의 경우 단일 사건의 충격만으로도 PTSD로 직접 연결된다”면서 “(특히 영상기자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복합적으로 PTSD들이 연결된다”고 밝혔다. 영상기자가 매일 접하는 현장이 개별적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 현장 경험이 누적되면서 고강도로 축적돼 복합적인 PTSD 증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가해지는 시각적·감각적 자극의 누적은 기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연구팀은 설문조사를 통해 수집된 정량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부트스트랩 5,000회’를 적용한 경로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외상 유발성 사건 경험 ➔ PTSD 증상 발생 ➔ 직무 이탈성 번아웃 발생'으로 이어지는 손상 구조를 확인했다. 고통스러운 현장을 지속적으로 목격한 기자는 직무를 기피하고 조직을 이탈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는 의미다. 토론자로 참석한 성균관대학교 글로벌융복합콘텐츠연구소 임인재 선임연구원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그리고 최근의 12·12 계엄 사태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격동적인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시각적 기록을 담당해 온 영상기자들의 정신건강 상태를 최초로 실증 모델을 통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는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계에 매우 의미 있는 이정표를 제시했다”며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병행해 데이터의 구체성과 신뢰도를 높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제2회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수상자인 필립 콕스 기자가 영상기자의 직업적 트라우마를 주제로 온라인 화상 토론을 하고 있다 “동료들의 지지, 가족의 인정이 카메라를 다시 들게 하는 힘” 그렇다면 참혹한 현장의 기록자들이 심리적 붕괴를 극복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게 하는 요인은 뭘까. 포럼에 참석한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한 목소리로 '공적 인정(Recognition)'과 '조직 및 가족 내부의 존중 커뮤니케이션 풍토'를 그 해법으로 제시했다. 조재희 교수 연구팀은 1980년 광주의 진실을 목숨 걸고 촬영해 전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기자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이 상이 위험 지역을 누비는 현역 영상기자들에게 실제로 어떤 심리적 의미와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기 위해 국내외 수상자 8명(국내 4명, 해외 4명)을 대상으로 심층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분석 결과 ‘힌츠페터 국제보도상’과 같은 권위 있는 공적 포상은 영상기자들에게 단순한 명예를 넘어,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고 극복하게 만드는 강력한 ‘직업적 확신’의 매개체로 작동하고 있었다. 조 교수는 “영상기자들은 공적 수상을 경험하면서 ‘내가 걸어온 길, 내가 목숨을 걸고 수행한 이 직업적 업무가 옳았구나,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었구나, 우리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구나’라는 강한 확신을 얻게 된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직업적 확신은 트라우마에 주저앉지 않고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외상 후 성장’과 현장 업무를 끝까지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의 인터뷰에 응한 수상자들은 “상을 받았지만 진짜 영웅은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싸운 시민들이고 나는 단지 그것을 세상에 전달한 매개자일 뿐”이라며 직업적 겸손함을 내비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포상이 내가 현장에서 감수해야 했던 생명의 위협과 정신적 고통의 가치에 타당성을 부여해 준다는 점에서, 심리적 회복에 실제로 거대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만 이들은 수상 이후에도 현장의 비극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느낌에서 오는 ‘미종결 사건 의식에 따른 도덕적 긴장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겪고 있다는 점도 밝혀, 지속적인 심리 지원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2022년 ‘뉴스상’ 수상자이자 이날 포럼의 두 번째 발제를 맡은 필립 콕스(Philip Cox) 기자도 공적 인정의 치유 효과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했다. 프리랜서 영상기자인 필립 콕스기자는 2004년 수단 다르푸르 사태를 자비로 취재하기 시작한 이래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전 세계의 가장 참혹한 비극의 최전선을 카메라에 담아온 인물이다. 특히 지난 2016년에는 수단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을 심층 취재하던 중 친정부 민병대에 납치되어 사막 한가운데서 인질로 억류되었고, 이후 정부의 비밀 구금시설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생사의 갈림길을 지나온 기자다. 콕스 기자는 저널리스트의 취재 환경을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는 거친 ‘바다’에 비유했다. 그는 “현장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며 위험하다. 선원의 진정한 능력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거친 폭풍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증명되듯, 돌발 상황에 대비한 철저한 사전 안전 훈련과 계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암흑 같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 제작한 심층 다큐멘터리 <수단의 스파이더맨>을 작업하면서 비로소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군사 정권의 폭정에 맞서 싸우는 젊은 활동가의 역동적인 모습을 백인 기자의 시선이나 내레이션 없이 온전히 수단 현지인들의 목소리로만 담아낸 이 작업은, 그에게 일종의 ‘엑소시즘(치유의 의식)’이자 영상이 가진 사회적 힘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아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프리랜서로서 이 위험한 결과물이 세상에 제대로 공개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과, 현지 취재원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 하루하루 피를 말리고 있을 때 들려온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수상 소식은 나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안도감과 공적 인정의 기쁨을 선사했다”고 회고했다. 콕스 기자는 “20년 넘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기자 생활을 했지만, 대한민국 국회와 광주 시상식에서처럼 언론인의 사회적 역할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환대해 주는 정치·사회적 환경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며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광주라는 공간을 통해 다시금 뼈저리게 확신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고 전했다. 공적 인정 외에 일상적인 직장 내부의 소통과 가장 가까운 가족의지지 역시 기자를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버팀목이 된다는 현직 기자의 증언도 나왔다. 2024년부터 2025년까지 우크라이나 분쟁 지역을 취재했던 KBS 신봉승 기자는 “기자에게 재난과 참사, 분쟁 지역 취재는 숙명과도 같다”면서도 “거대한 참사의 자극도 크지만, 때로는 현장에서 마주친 아주 사소하고 감각적인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는 강력한 트라우마로 각인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조 교수가 언급한 ‘공적 인정과 조직 내 존중의 힘’에 공감했다. 신 기자는 “KBS 내부 사내 시스템에서 매일 아침 전 직원의 조회가 가장 높은 항목은 다름 아닌 ‘오늘의 편집회의’ 결과”라며 “어제 어떤 기사와 영상이 좋았고 누가 수고했는지를 공식적으로 격려하는 데스크와 동료들의 평가, 이 작은 소통이야말로 현장 기자들이 갈구하는 첫 번째 ‘인정’의 형태”라고 짚었다. 가족의 지지와 인정 역시 카메라를 다시 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신 기자는 “일 핑계로 주말에 집에서 누워만 있어 아이에게 ‘핸드폰만 보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언론상을 수상할 때 아이를 데려간 이후 아이가 학교에서 아빠의 직업을 자부심 있게 말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며 “공적 인정을 매개로 가장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이 보내주는 지지와 존중이 있을 때, 아무리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위험한 현장이라도 다시 뛰어들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공적 인정의 상징이 외부의 힌츠페터상이라면, 매일 부딪히는 조직 내부와 동료들의 존중 커뮤니케이션은 번아웃을 예방하고 PTSD를 극복하게 만드는 가장 즉각적인 주체”라고 덧붙였다. 중소 언론인, 프리랜서, 자원봉사자 등 ‘사각지대’ 깰 공적 치유 체계 ‘시급’ 참석자들은 영상기자들의 PTSD 극복을 위해 해당 언론사의 사내 복지 차원을 뛰어넘는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공적 지원망의 구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강도 위험에 노출된 기자들이 선택하는 대표적인 개인적 대응 전략은 '트라우마에 대한 회상과 소통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회피 전략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두려워 동료나 가족에게 현장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기자들이 심리적으로 무뎌져 치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제도적이고 강제적인 공적 보살핌이 개입해야 한다. 조재희 교수는 “자신이 겪은 상처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둬두었다가 전문가의 체계적인 도움없이 홀로 밤에 잠들기 전 갑자기 끄집어내어 되짚어보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제대로 된 심리적 안전장치 없이 상처를 독자적으로 마주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또 다른 형태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며 “안전한 환경에서 상처를 끄집어내는 ‘의도적 반추’를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원망을 시스템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이날 포럼에서는 거대 언론사의 조직적 시스템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과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 언론사, 지역 언론 및 인터넷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처한 정신건강의 사각지대도 해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필립 콕스 기자는 거대 언론사의 완벽한 사내 복지 시스템을 즉각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프리랜서나 영세 언론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강력한 즉각적 치유책으로 '동료 간 상호 지원 네트워크'의 활성화를 제안했다. 콕스 기자는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내면에서 소화해 내는 속도와 방식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전쟁터나 재난 현장을 먼저 경험한 베테랑 경력 기자들과 이제 막 현장에 진입해 충격을 받은 신입 기자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신체적·정신적 안전 상태를 살피며 고통을 공유하는 대화와 연대의 문화를 현장에 정착시키는 것이 치유 체계 구축의 위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언론사 경영진을 향해서도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저널리스트가 결국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더 좋은 저널리즘을 만들어낸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봉승 기자는 “내가 속한 대형 방송사(KBS)에는 다행히 사내 심리 상담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프리랜서 영상저널리스트나 규모가 작은 언론사, 인터넷 언론사 소속 기자들은 PTSD를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유해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다”고 우려했다. 신 기자는 이어 과거 아프리카의 참상을 촬영한 <수단의 굶주린 소녀>로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진기자 케빈 카터의 비극을 언급하며 “우리 사회가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도 언제든 이런 비극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공적 지원 체계의 수혜 대상을 언론계를 넘어 현장과 연대하는 시민사회로까지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기자는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와 봉사활동에 참여했다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음에도 아무런 국가적 돌봄을 받지 못했던 대학생의 사례를 소개하며 “특정 재난이나 참사 현장에서 함께 상처받은 시민 봉사자들과 언론인 모두를 아우르는 ‘공적 차원의 트라우마 통합 지원 체계’가 구축될 때, 우리 사회 전반의 재난 극복 역량도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상기자의 트라우마와 극복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경청하며 필기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언론인 맞춤형 PTSD 척도 마련 필요” 한편, 임인재 연구원은 이번 포럼에서 도출된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연구가 한 단계 더 발전적으로 지속되기 위한 방안을 제안했다. 먼저 임 연구원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가졌던 역사적 부채의식과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현재의 젊은 기자들에게도 기성세대와 동일한 무게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임 연구원은 이어 이번 연구에서 제시된 ‘외상유발사건 경험 척도’를 ‘언론인 맞춤형 진단 도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소방관들이나 재난 구조대원들의 경우 직무 특수성을 반영해 화재나 사체 목격 등 유형별 고통의 강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특화 척도가 존재한다. 그는 “연구에서 활용된 구체적인 설문 문항들을 후속 연구나 현장 매뉴얼에 상세히 공개한다면, 위험에 노출된 기자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보호하는 실무적인 가이드라인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경숙 기자 cat1006@naver.com
202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