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영상기자 협회보

NEWS

지속가능경영
  • 영상저작권과 방송저널리즘 세미나 개최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회장 양용철)는 영상저작권과 방송저널리즘 세미나를 지난 20일 오후 6시 한국방송회관 회견장에서 개최했다. 언론중재위원회 양재규 변호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는 이대희 고려대 교수, MBC 류종현 부장, 이동기 국민대 교수, 김종원 상명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고, 토론은 이신 변호사, 박형상 변호사, 노재덕 경향신문 영상미디어국장, 박원경 경원대 교수가 참여했다. 영상저작권 세미나는 저작권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점에서 저작권에 대한 법률적 해석을 통해 영상 저작권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법률 개정에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고자 기획됐다. *세미나 자료는 교육&연수 카테고리에 올렸습니다.
    2009-11-25
  • 제23회 한국방송 카메라기자상 수상작 발표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19일 제23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본선 심사를 협회회의실에서 실시했다. 본선에는 총 29편의 후보작(뉴스부문 8편, 기획보도부문 4편, 다큐멘터리부문 7편, 지역보도부문 7편, 보도영상편집부문 3편)이 올라왔다. 시상식은 12월 9일 오후7시 여의도 국민일보 CCMM빌딩 메트로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 대상 ★ KBS 손병우 '쌍용자동차 대치 나흘째, 도장 공장 안에선… ' 뉴스 부문 최우수상 MBC 김신주 용산 참사 철거민 추락 특종 우수상   MBC 서영호 집중취재 '공포의 지뢰밭' 우수상   YTN 지대웅 노무현 전 대통령 마을뒷산에서 투신...서거 우수상   OBS 현세진 인천 도시축전 경비행기 추락 사고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 KBS 김대원, 김성현 산악인의 동반자, 셰르파 우수상   MBC 김기덕 심야의 무법자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 MBC부산 최병한, 박태규  빛을 향해 달리다 우수상   KBS 김광수, 조현관 자동차 대해부-부품산업이 녹슨다 우수상   KBS 조현관 경제위기, 벼랑에 선 아이들 지역보도 부문 최우수상 MBC부산 이윤성 KTX 국내최장 금정터널 긴급 점검 우수상    CJB 박희성 영상리포트 (아찔한 등하굣길) 우수상    KBS제주 강재윤 단속카메라 비웃는 반사번호판 보도영상편집 부문 최우수상 KBS미디어텍 서삼현 2008년 국제 10대 뉴스 특별상 SBS 8시영상팀 뉴스부문 본선진출작 YTN 김종완 도심에 나타난 천연기념물 수리부엉이 KBS 강승혁 베일 속 ‘당첨소주’ YTN 원종호 서울 주택가 멧돼지 소동! 기획보도 부문 본선진출작 MBC 권지호 야생동물의 습격  다큐멘터리 부문 본선진출작 KBS순천 서재덕 한센병 백년 보도특집 <100年의 참회록> SBS 제일 얼굴이 사라진 여인들  KBS대전 심각현 한우 아리랑  KBS 김대원 ‘하루2명 예고된 죽음’ 산업재해  지역보도 부문 본선진출작 MBC전주 유철주 보육인가? 사육인가?  MBC마산 주상동 수입수산물 원산지 둔갑 적발 KBS제주 조승연 '주민소환' 방해 지나치다 KBS강릉 박찬규 이동 봉사 차량 편법 운행  보도영상편집 부문 본선진출작 KBS미디어텍 김철 전자발찌 1년, 내 아이는 안전한가?  MBC 양홍석 남도에서
    2009-11-19
  • 스타 없는 대표팀의 거침없는 질주
    이집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U20 FIFA 월드컵’(20세 이하 청소년 월드컵)대표팀 선수 명단을 확인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아는 이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홍명보號 스타급 선수의 부재’ , ‘죽음의 C조’(대한민국, 독일, 미국, 카메룬) 등 대회 전부터 따라다니던 꼬리표들. 거기다 축구 출장 기간은 예측 할 수 없지만 조 편성을 보니까 본선 3경기 후 바로 오겠다는 선배들의 농담까지. 가장 쉬운 상대인 카메룬과의 첫 경기에서 2대 0 완패. 정말 이대로 끝인가? 다음 경기는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독일전. 골대 뒤에서 우리 선수들만큼이나 긴장한 나의 카메라 탤리가 경기 시작 휘슬과 동시에 켜진다. 지면 무조건 탈락인만큼 우리 선수들의 투지나 움직임, 조직력 등이 카메룬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지만, 상대편 골망을 쉽게 흔들지는 못했다. 결국 전반 33분 독일의 역습에 선제골을 내주면서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후반 22분 김민우의 기적 같은 동점골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남은 시간 내내 독일팀을 압박하면서 전원 분데스리거(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프로 선수)로 구성된 팀을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1대 1 무승부였지만 선수들도 스스로 경기에 만족했는지 박수를 치며 그라운드를 나갔다. 끝이 아닌가? 좋은 예감이 든다. 운명의 미국전이 열린 수에즈 ‘무바라크’ 경기장. 경기 시작 전부터 현지 교민과 유학생, 그리고 붉은 악마 원정 응원단의 목소리는 사막의 거센 모래 바람을 잠재우듯 강렬했다. 상대하기가 만만찮을 거라는 미국 팀은 선제골을 내주자 쉽게 무너졌고, 우리 팀은 압박 수비와 철저한 조직력을 앞세워 3대 0으로 완승을 하며 16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모든 선수들이 한국 응원단석으로 뛰어가 한가위 맞이 큰절을 올리는 세리머니는 오늘의 하이라이트. 그라운드에서 추석을 맞게 된 나 역시 가슴이 뭉클해지며 대표팀과 응원단에게 카메라 포커스를 맞춘다. 내 옆의 외신 기자들도 좋은 그림꺼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댄다. 드디어 카이로 행! 사실, 할 거 없고 볼 거 없는 운하의 도시 수에즈보다는 그래도 창을 통해서나마 관광이라도 할 수 있는 카이로가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잠깐 동안 설레었다.(사실 시간이 없어 수에즈 운하조차 보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수에즈로 이동하느라 하루를 날린 우리 대표팀에게는 하루밖에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하루의 연습 시간도 대표팀 버스 유리창이 깨져 지체되고, 대표팀을 호위하는 경찰 호송차가 연습장 가는 길을 헤매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또다시 낭비해야만 했다. 경기장 잔디도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이틀을 충분히 쉰 파라과이팀에 비해 휴식 시간도 부족해 여러모로 안 좋은 상황이었음에도 우리 대표팀의 사기와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좋아 보여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버스 유리창이 깨진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카이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무바라크’ 경기장보다 경비가 삼엄하고 취재팀이 경기장 내로 들어가는 절차 또한 까다로워 짧은 영어로 여러 번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그라운드로 내려갈 수 있었다.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 크기에 비해 우리 응원단의 규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함성 소리는 90분 경기 내내 경기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경기 전반을 득점 없이 마친 후 반대편 골대로 걸어가면서 함께 간 선배가 “용한아! 후반에 두 골만 찍어봐라”는 주문에 호응이라도 하듯 태극 전사들은 파라과이를 상대로 거침없이 밀어붙여 세 골이나 뽑아냈다. 김보경의 선제골에 이어 김민우의 연속 두 골! 파라과이는 침몰했고, 우리는 1991년 남북단일팀이 출전한 포루투갈 대회에 이어 18년만에 8강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버스 유리창 사건은 다행히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이 났다.   예상보다 우리 팀 성적이 좋아서 출장이 하루하루 연장됨에 따라 취재팀의 기세는 선수들 못지않게 하늘을 찔렀으나 체력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아침 뉴스와 8시 뉴스용으로 선수단 스케치, 감독과 선수 인터뷰, 스탠딩, 오디오 등 보내야 할 분량은 많은데 인터넷 속도가 느려 송출을 마치면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70K bps 정도 나오던 속도가 계속 떨어지더니 5분도 안돼 1K bps까지 나오기도 하고, 경기장에서 무선랜으로 그림을 보내는 도중 FIFA에서 시간이 늦었다며 인터넷을 끊어 버리는 바람에 부랴부랴 숙소로 총알버스를 타고 날아가 아침 뉴스를 간신히 막기도 했다. 특히,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음 날 아침 뉴스에 댈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불안한 인터넷 환경은 나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곤 했다.(시차-이집트가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아프리카의 강호 가나와의 8강전. 이기면 1983년 멕시코 대회 이후 26년만에 4강 진출이다.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만큼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은 대단했다. 삐익! 휘슬과 함께 시작된 90분의 경기 내내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지만 결국 3대 2로 패하고 말았다. 잔인한 종료 휘슬과 동시에 가나는 웃고 대한민국은 울었다. 비록 아쉽게도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U20 FIFA 월드컵’은 세계에 대한민국의 축구를 또 한번 각인시켰음이 분명하다. 참가국 중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던 한국이 세계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맘껏 기량을 뽐냈으니까 말이다. 이집트에서 축구는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대회를 취재하는 내내 곳곳에서 한국팀 최고다, 한국이 이기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수없이 많이 들었을 정도로 대한민국팀의 플레이는 이집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 듯 했다. “대표팀 선수 선발에 100퍼센트 만족한다. 모두 너무 잘해줬다”는 홍명보 감독의 말과 “스타 선수는 없지만 스타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신다. 우리까지 스타면 감독님과 코치님이 죽는다” 는 김보경 선수의 대답은, 바로 선수를 믿어주는 감독, 그리고 자신들을 낮추고 감독과 코치를 높일 줄 아는 선수들이 하나가 되는 분위기가 8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낸 비결이 아니었을까?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길어진 18박 19일 간의 장기 출장.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옆에서 젊은 태극전사들의 땀과 투지, 그리고 열정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SBS 이용한 기자
    2009-11-12
  • 줌인 '회귀'
    지난달  20일 국경없는 기자회(RSF)는 세계언론자유지수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175개국 중 지난해 47위에서 22단계 하락한 69위다. 언론탄압이 극심했다고 일부 보수언론이 주장한 노무현정권 때와 비교하면 38단계나 하락한 수치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기관에서 발표한 객관적인 결과라 충격적이다. 그간 국가이미지 개선과 브랜드 향상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에서 위상변화를 추구하던 정책이 허구임이 들어났다. 작년부터 이뤄진 언론에 대한 일련의 탄압 - 미네르바 구속, 언론노조위원장 체포,  YTN기자해직,   검찰의 PD수첩 수사 등- 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언론악법통과, 용산참사 판결, 교사 시국선언 처벌 등 우리사회의 주요한 결정들이 사회적 합의 없이 정권의 주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는 데서 그 심각성은 더하다. 시계가 마치 과거로 돌아 7,80년대 군사정권 시대로 후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G20 의장국 - 정식기구가 아닌 정규직원도 없는 회의체에 불과하지만- 선출과 경제회복 기미로 잔뜩 고무된 현정부의 자신감은 언론과의 상생보다는 순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균형잡힌 견제가 아닌 밀어붙이기식 언론정책의 말로는 뻔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정부는 결국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빵으로 국민의 주린 배를 채우기만 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천박한 인식은 영혼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것이다.'  300백년 전 프랑스 작가 볼테르가 한 말이지만  최근 들어 우리사회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오승근 편집장 / KBS 영상취재국
    2009-11-12
  • 금강산, 눈물과 감동의 2박 3일
    금강산, 눈물과 감동의 2박 3일 - 추석계기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다녀와서 공교롭게도 작년에 이어 다시한번 금강산에 다녀올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615공동선언 8주년 행사가 금강산에서 치러진지 한 달 만에 박왕자 씨 피격 사망사건이 발생해 지금껏 관광이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처음으로 공동취재단이 금강산을 다시 방문하게된 것이다. 2년 만에 재개된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지난 9월 26일부터 엿새 동안 두 차례로 나뉘어 이루어졌고, 2차 상봉단으로 북측가족 99명을 만났던 남측 가족 420여명과 이번 짧은 여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여섯 개의 방송사가 함께하는 풀 카메라기자단 역시 둘로 나뉘어 교대로 방북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은 바로 송출문제였다. 지금껏 금강산에서 이루어진 행사를 취재할 때는 주로 북측 현장에 중계차를 두고 수시로 위성송출을 해왔다. 그러나 송출과정에서 북한 당국이 영상을 모니터하고 노골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였고, 게다가 남북관계 역시 이전보다 순탄치만은 않은 상황에서 문제없이 이번 취재를 진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가 우리측 정부와 취재단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남측 동해선 출입국사무소에 중계차를 두고 북측 현장으로부터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통일부 행낭을 통해 그림을 운반하기로 결정되었다. 앞으로의 취재에서도 있을 북측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의 선례를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 카메라기자들의 입장에서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북측 땅에서 회사와는 물론 중계 포인트와도 사실상 연락이 두절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담은 한층 가중된 셈이었다. 남북의 가족들이 처음 만나게 된 장소는 지어진지 1년여 만에 제 역할을 하게 된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였다. 앞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약속은 미리 사례로 정한 가족들을 취재할 때 정해진 테이블의 번호표를 먼저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들 가족들의 첫 상봉장면은 각 사별로 뉴스 특보를 통해 송출과 거의 동시에 방송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제작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상봉장에서는 방송사 세 팀이 몇 가족씩 사례를 나누어 곳곳을 취재하기로 했다. 특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되도록 커트를 나누기보다는 얼싸안고 흐느끼는 모습부터 오고가는 대화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봉이 시작되자 면회소 전체는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지금껏 자료로만 보아오던 광경이 뷰파인더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에 흥분되기도 했고 흐느끼는 가족들과 함께 감격에 젖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이 뒤섞였다.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아버지와 딸,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가족들까지 상봉장은 눈물어린 사연들로 가득했다. 취재를 위해 정신없이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다가도 가족들에게 다가가면 어느덧 우리역시 그들의 일원이 된 듯 몰입하였다. 한편 취재를 불편히 여기는 가족들도 있었다. 촬영하고 있는 취재진에게 찍지 말라며 화를 내는 북측 할아버지와 카메라를 들이대자 갑자기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대화를 꺼내는 할머니를 보며 어쩌면 우리의 취재가 반세기만의 천금 같은 그들의 만남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더욱더 조심스럽고 숙연한 마음가짐으로 취재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마련된 저녁 만찬. 북측 기자들과의 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중앙통신사의 사진기자와 카메라기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일을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다른 성격의 일을 하는 사람들 간의 만남. 처음은 어색했지만 몇 차례 오고가는 술잔에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들은 남한 사정에 놀랍게도 정통한 편이었고 대화도 아주 잘 통했다. 나이가 훨씬 지긋했지만 우리에게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줬고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 속에서도 최대한 정치적인 주제의 대화는 피하려고 우리 모두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아직은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남북 간의 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자리 덕분에 다음날부터 현장에서 그들과 마주쳤을 때는 서로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안부도 묻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만나야한다’ 고 했던 어느 통일운동가의 말을 세삼 실감하게 되었다. 두 번째 날은 야외상봉이 예정되어 있었다. 1차 상봉 때에는 날씨 문제로 열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취재진들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외금강호텔 옆 잔디밭에서 가족들끼리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은 야외상봉은 보도된 대로 ‘가족소풍’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가족들이 그렇게 흥겹게 노래를 열창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노랫소리가 퍼져 나오는 곳을 따라 정신없이 카메라를 움직이다 제주가 고향이라는 북측 할아버지의 ‘찔레꽃’이라는 노래를 그대로 담아냈다. 울음에 목 메이며 부르는 그리운 남쪽나라 고향의 노래. 어느새 모두가 함께 목이 메여오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예정된 이별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었기에 작별상봉의 분위기는 전날과 달리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간 찍은 사진들을 정성스레 쓴 편지와 함께 교환하고 족보를 가져와 서로 확인하고 맞추어보는가 하면 마지막 상봉이라는 생각에 만나자마자 서럽게 우는 가족들도 있었다. ‘언니 고마워.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아줘서…’ 무선마이크 너머로 들려오는 두 자매의 대화는 어떤 슬픈 영화보다도 더 극적이고 안타까웠다. 한 시간여의 작별상봉이 끝나고 북측 가족이 먼저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됐다. 앞으로 취재를 하면서 눈물을 흘려볼 경험을 얼마나 하게 될까. 버스에 타 기다리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뛰어나오는 남측의 가족들. 차창사이로 손을 부여잡으며 오열하는 그 모습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가족들도 기자들도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울었던 마지막 날의 아침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취재도 모두 끝이 났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제껏 그저 숙소인 외금강호텔과 면회소 정도만을 오갔을 뿐, 정작 금강산의 절경은 제대로 구경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삼일포나 주변의 경치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루빨리 관광이 재개되고 이산가족들의 만남도 면회소에서 상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비치는 북녘의 모습은 무척 황량했다. 바위산과 민둥산, 옥수수 밭과 멀리 간간히 보이는 주민들은 마치 이국적인 풍경인양 창문 밖을 스쳐갔다. 남과 북의 각 출입국사무소를 지날 때마다 모든 짐을 검사받고 복잡한 절차를 거친 후에야 다시 남한으로 귀환할 수가 있다. 정작 금강산에서 속초간의 거리는 차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데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남과 북의 마음의 거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분단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기자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분단의 아픔을 몸소 느끼게 해준 소중한 추억을 금강산에 남겨둔 채 우리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최 진 영 mbn 영상취재부 / havenot21@hanmail.net
    2009-11-12
  • 경비행기 추락,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
    9월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바람은 좀 불었지만 청명한 가을 날씨다. 그래 오늘 인천 도시축전에서 글라이더와 경비행기 축하 비행이 있다고 그랬지. “그림 좀 되겠다. 가자!” 그렇게 취재가 시작됐다. 미추홀 분수대 위에 하늘하늘 휘황한 연들이 떠 있고 구름은 맑았다. 조종사들이 글라이더 편대를 이루며 멋지게 주차장 쪽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걱정을 하더니 이정도면 괜찮은 가 보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도 축하비행을 하기로 한 경비행기 두 대가 날아왔다. 날아오는데 속도가 제법이다. 방향도 좀 이상하다 느낀 순간, 한대가 연줄에 걸렸다. 본능적으로 뷰파인더 안에서 경비행기를 찾았고 레코더 버튼을 눌렀다. ‘뷰 파인더’ 안에 연줄을 단 경비행기는 왼쪽으로 기운 채 좌우로 비틀어 대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삼각대에 대고 촬영하다가 피사체를 놓쳐 낭패를 본 경험이 떠올라 카메라를 삼각대에서 떼어 어깨에 짊어졌다. 물론 레코더는 ‘ing’ 순간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경비행기는 필사적으로 연줄에서 벋어나려고 몸부림 쳐 댔지만 연줄의 길이가 허용하는 범위 까지. 안타까운 선회비행은 약 2분간 지속됐고 연줄은 점점 짧아졌다. 결국 두 명의 조종사를 태운 경비행기는 관광용 2층 버스 측면으로 곤두박질해 추락했다. 반 토막 남은 비행기에서 나온 매캐한 연기, 막무가내로 취재를 막는 조직위 직원들, 구조와 구경.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비행기가 떨어질 확률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다고 한다. 덕분에 축하(?)는 받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 못하다는 것을 모든 사건기자들이 다 안다. 이 자리를 통해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근데 도시 축전 관객이 사고 이후 더 늘어난 까닭은 뭘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빌 뿐.   OBS 현세진 기자
    2009-11-12
  • 기아의 혼 이종범, V 10 의 꿈을 향해
    기아의 혼 이종범, V 10 의 꿈을 향해 기아 타이거즈가 해태시절인 97년 이후 12년 만에 정규리그 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만끽했다. 정규리그 종료일을 불과 이틀 앞두고 1위를 확정지은 기아는 19연승을 거두며 맹렬하게 추격해오던 2위, SK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다. 팬들은 12년 동안 참아왔던 함성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한국시리즈 직행을 자축했다. 운 좋게도 가까운 거리에서 감동의 현장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사회팀원인 내가 스포츠 취재 현장에 갈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촬영기자들이  KBS인터넷뉴스 “온새미”를 통한 1인 제작 시스템에 대한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인 제작시스템이란 촬영기자가 아이템 구상, 콘티 구성, 연출, 촬영, 편집 등 전 과정을 혼자 해내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매일 매일 취재현장을 누비고, 하루에 한 개 이상의 뉴스를 제작하고 있지만 촬영기자들이 갖고 있는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란 분명 한계점이 존재한다. 설령 역량을 제대로 펼친다고 하더라도 취재기자 대 촬영기자의 역학관계로 인해 촬영기자가 의도한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 중 하나는 촬영기자 스스로가 기획하고 취재하고 편집해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팀 캡과 젊은 촬영기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부문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한 결과 기존 온새미에 새로운 형태의 포맷을 만들어 취재현장에서의 자투리 영상뿐만 아니라 인물이라는 코너를 새롭게 만들어 1인 제작시스템을 정착시키고자 했고 그 첫 번째 주자로 내가 나서게 됐다. 그동안 뉴스를 수도 없이 제작했건만 막상 시작하려니 10분이 넘는 프로그램을 혼자서 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생겼다. 더불어 새로운 시도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심리 또한 생겼다. 모든 작업을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 많은 고려를 해야 했다. 어떤 소재를 택해야 하는지, 주제를 이끌어 내기 위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등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고려가 선행되어야 했다.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정규시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아타이거즈의 1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돌풍의 중심에는 이종범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종범 선수의 역할을 조명해 보고자 했다. 1. 준비 단계 - 아이템 선정과 섭외   인물이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라는 성격에 맞추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누구나 공감하는 인물을 선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섭외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기아 타이거즈가 1위를 확정지을 무렵, SK는 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고 기아는 연패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기아 홍보팀과 선수단 분위기는 근접취재를 허락하지 않았고 1위가 확정된 후에라야 취재에 협조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 의도한 다큐형식의 인물 조명은 물 건너가고 이런 분위기라면 1위를 확정하고도 섭외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운동장이 아닌 실내에서 20분 정도 이종범 선수와의 인터뷰 시간을 허락 받았다. 2. 구성 안 작성 먼저, 구성을 하기 이전에 소재를 표현할 다양한 이야기 구조와 흥미로운 극적 전개 방식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주제를 이끌어갈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의 뼈대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또한 장소나 주변인물에 대한 섭외,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 그 이야기를 이끌어갈 접근 방법에 대한 사전조사를 한 후에 기획서를 작성하고 구성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사회팀 일을 하면서 사전 조사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  작성한 구성안은 다음과 같다 - 이종범의 꿈에 대한 이야기: 이종범 선수 인터뷰 시작 - 기아타이거즈 우승 확정 경기: 관중 열기와 인터뷰 및 이종범 선수 활약상 - 기아 우승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종범 선수의 역할 - 예전의 해태 타이거즈 화려한 시절 -9 번 한국시리즈 우승 - 해태 시절의 이종범 선수의 활약상-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 시즌196개 안타와 84개 도루 - 절정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고 부상과 슬럼프를 경험 - 기아타이거즈유니폼을 입고 국내 복귀:  프로야구 흥행 돌풍을 몰고 옴 - 이종범 선수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고 나이와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구단으로부터   은퇴를 종용 받고 플레잉 코치직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이종범 선수는 20살이나 어린 후배들과의 경쟁을 선택하고   땀을 흘리고 그 결과 기아 우승의 원동력이 되었고 바람의 아들에서 근성의 상징으로 각인 될 수 있었다 - 이종범 선수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소망 :인터뷰로 구성 3. 현장 취재 및 편집 처음 약속과 달리 우승을 확정 한 후에도 선수단의 분의기는 한국시리즈를 대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의 자유로운 취재는 허용되지 않았다. 한 선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약간의 연출은 꿈도 꿀 수가 없었고, 제한된 시간에 빨리 취재하고 이종범 선수를 인터뷰 하는 것으로 촬영을 끝내야 했다. 주변 선수의 인터뷰와 선수단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영상이 필요했지만 선수들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문제라 홍보팀에서 난색을 표명했다. 거듭 반복되는 요구로 인해 다행히 3명의 동료 선수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많은 자료와 짧은 취재 원본을 가지고 10분이 넘는 분량을 편집했다. 영상에 맞는 음악을 선곡 하고, 기사를 쓰고,  NLE 편집을 하고, 자막을 넣었다. 며칠에 걸친 편집으로 힘은 들었지만 그야말로 1인 제작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촬영기자 생활 8년, 적지 않은 그동안의 경험은 모든 취재에 자신 있어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생각과 달랐다. 섭외는 쉽지 않았고 글쓰기도 익숙하지 않아 한자 한자 써 내려 가는 것은 너무나 힘든 작업이었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세부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기에 한계도 있었다.  혼자 힘으로 프로그램 전 과정을 해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변했다. 그동안 각 방송사 특성에 맞게 ‘영상’이라는 코너로 촬영기자 1인 제작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다행히 KBS의 경우 ‘온새미’에서 촬영기자들이 기획/취재/편집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 다만 어렵게 제작된 프로그램이 KBS 인터넷홈페이지가 아닌 공중파방송으로도 전파를 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기존시스템에서 촬영기자가 아이템을 직접 선정, 제작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방송장비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촬영하고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취재현장에서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6mm 카메라들과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고 그들은 VJ 라는 이름으로 각 방송사의 사정에 맞게 제한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이상 방송사 촬영기자라는 말이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래된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이번 온새미 제작의 결과는 작지만 과정은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KBS 안용습 기자
    2009-11-12
  • SBS뉴스텍 정진기 전 사장님에게 공로패 전달
    SBS 뉴스텍 정진기 전 사장님에게 공로패 전달...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회장 양용철)는 지난 9월 18일 SBS 뉴스텍 사장과 고문으로 재직하셨던 정진기 전 사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황금 들녘인 가을! 김포를 찾은 협회장은 정 전 사장께 대한민국 방송의 발전과 공정한 보도영상 확립을 위해 노력하신 노고에 보답하고자 후배들의 정성을 담은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 전 사장은 “이렇게 직접 찾아와 즐겁고 따뜻한 시간을 만들어준 협회와 후배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했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며, 盛年不重來(성년부중래)하고 一日難再辰(일일난재신)하며 急時當勉?(급시당면려)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이라는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때에 이르러 지금 열심히 살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를 하며 후배들이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고 전했다. 정진기 전 사장 이력   1972       국방 뉴스 입사   1972       월남 종군기자   1975       국방과학연구소 (특수촬영)   1983       MBC 보도국   1991       SBS 영상취재팀   1997       영상편집팀장   1998       영상취재팀장   2001       영상담당 이사   2005       SBS 뉴스텍 대표이사   2008       SBS 뉴스텍 고문역
    2009-11-11
  • 선배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전 충주 MBC 이재은 사장]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함으로 보람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긴장의 연속적이었던 생활에서 퇴임 후 늘 내가 생각해왔던 일들을 실천하게 되어 기쁘다. 뭐 거창한 일도 아니고 아주 작은일 이지만 나의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 그 동안 문화방송이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많은 혜택을 받고 살았기에 낮은 곳에서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일산 주엽1동의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으로 동네를 섬기는 일을 찾았다. 매주 아침이면 중고생과 함께 길거리 쓰레기 줍기, 아내와 함께 노인복지관에서 배식과 설거지하기. 주민자치위에서 운영하는 밭에 가서 몸으로 땀 흘리는 노력봉사. 내 자신이 필요하다면 “예”하고 달려가려고 한다. 물론 주말 농장도 해서 무농약 야채도 가꾸지요. 요즘 지역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30여년간의 언론경험을 살려 지역의  작은 이야기부터 주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기사를 통해 따뜻한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좋은 사업도 기획할 겁니다. 충주 문화방송에서의 경험으로 불우 이웃돕기, 도농간에 농산물 직거래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 내가 남은 생애를 나를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께 칭찬 받는 일을 찾아 “너 무엇하고 왔니” 하면 “아주 조금 일하다 왔어요” 하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도 큰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법을 좀 더 배울 것이다. -문화방송 공채 카메라기자 1기로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고 현직에 계시는 동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 오랜만에 뽑은 터라 저와 전평국 기자(현 경기대교수)는 보도국 선배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 같다. 특히 취재기자 선배들이 좋아했어요.   “요 쫄 다구들~” 하며 우리들을 보면 싱글벙글 귀여워했다. 하루에 7-8건 눈코 뜰새 없이 필모카메라를 가지고 버스와 택시를 타고 다니며 취재를 죽어라 해도 마음은 즐거웠다. 특히 9시 뉴스에 내가 촬영 한 것이 나가면 피곤이 말끔히 가시었다. 그당시에는 동시녹음이 되지 않아서 오디오 테이프와  화면 인터뷰가 딱 맞아 나오면 박수치고 그랬다. 나에게 잊지 못할 사건은 무엇보다도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 이다. 청와대 1진인 임채헌 선배와 나는 폭탄이 터진 현장에 있었다. 내 옆에 있던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 묻은 옷을 입고 버마 순방에 동행했던 재계 총수들에게 호텔에서 사건 전모를 설명하던 일이 생각난다. 이후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다. 전두환 대통령 초기, 그리고 노태우대통령 중기부터 김영삼 대통령까지 청와대 출입을  7년 했다. 전 대통령 초기에 새벽부터 언제 할것 없이  순시가 많았는데 1진인 장기완 선배는 청와대에서 준 삐삐가 있었지만 난 언제 연락이 올줄 몰라 일요일엔 꼼짝 못하고 전화통 근처에서 떠나지 못하는 생활을 몇 년간 했다. 나의 황금기는 파리 특파원 5년이다. MBC와 KBS 양사가 경쟁이 아주 심할 때다. MBC는 엄기영, KBS 기자는 박성범 특파원. 평기자와  국장급의 관계였다. 상대사는 국장급이 평기자 처럼 아무거나 취재할 수 없다고해 무척 애먹었다. 그 당시 유럽은 우리에게 무척 생소하여 아무 아이템이나 잘 먹혔다. 또 특파원의 상징인  '바바리 엄'  신화가 탄생되기도 했다. 파리는 내가 세계적인 특종을 한 곳이다. 파리 폭탄 테러로 시내에 하루가 멀다하게 폭탄이 터져 비상이었다. 아랍계가 감옥에 갇혀 있는 우두머리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하며 계속 폭탄을 설치하며 파리를 공포로 만들었다.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꽝하는 폭음을 듣고 달려가서 현장을 취재했다. 맨 처음 촬영한 특종 이었다. 내가 촬영한 화면은 한국문화방송 촬영 멘트와 자막으로 유럽은 물론 미국 전 세계에 나의 허락을 득한 후 방영되었고 미국 방송에선 화면 제공료를 주어 특파원들과 회식을 했다. 그 당시 한국이 잘 알려 지지 않았을 때 인데 유럽 한인 사회에선 이야기꺼리였고 특파원이 끝날 때 까지 유럽 내에서 출장 다니면 늘 화젯거리였다. 내가 간부가 되며 회사의 기독 신우회에 입회 하게 되었는데 나 자신을 크게 변화 시켰다. 집이 일산이라  출근길 교통 체증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동네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본 후 또 다른 녹음 설교 테잎을 들으며 출퇴근을 하였다. 엄청난 양의 설교를 7-8년간 들었다. 신우회에서 회장을 3년 동안 했다. 분위기는 참 좋았다. 회사를 위해 새벽 기도를 매주 1회 수요일 보고 목요일은 예배 우리는 우리가 회사의 밑거름이 되자 나보다 나의 동료가 잘되게 하자.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유명한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던 일은 나에게 자신을 묶어 놓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의 후배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을 수 있던 좋은 기간이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들어오는 후배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 안아주곤 했다. 밤늦게 까지 편집하는 후배 , 자료실 그리고 오디오실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퇴직 후 나의 마음은 늘 평안하다. 나 혼자 짝 사랑 일지 모르지만  영상부문 후배들과 신우회 회원들을 마음껏 사랑한 것 같다. 카메라 기자로서 대표 이사직을 지내셨습니다. 어떠셨는지요? 갑자기 밤에 충주 문화방송 사장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전화를 받고 무척 당황스러웠다. 27년 영상 부문만 한사람이 해낼 수 있을까?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나홀로 빠져 여의도를 떠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을 때도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홀로 가겠구나!  정말 잘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카메라 기자가 사장으로 가니 내가 잘 해야 후배들도 다음에 기회가 올 텐데 정말 수도자의 마음으로 충주를 향해 떠났다. 문제는 모두 나 자신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생각에 공과 사를 구분하자, 금전관계를 깨끗이 하자, 나를 낮추고 잘 섬기자 그리고 회사뿐 아니라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방송이 되자라고 되새기며 다짐했다. 그래서 아예 전 가족이 이사를 했다. 출퇴근 업무 이외 회사차를 쓰지 않고 개인차를 사용하였다. 한 차례도 나의 마음 속에 사장이라고 직원보다 높다고 생각한적이 없다. 그러나 서울에서 후배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사랑을 쏟으려 노력했으나 직책이 사장이라 쉽진 않았다. 나는 출근 하자마자 골방에서 무릎 끊고 기도했다. 충주 문화방송과 지역을 위해 그리고 순간순간 회의 들어가기 전 그리고 늘 하나님과 동행 하려고 애를 썼다. 특히 늘 부족하기에 지혜를 구하였다.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근무했다. 업무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카메라기자로 이곳 저곳 겪고 닦은 방송 경험은 현업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더 앞서 있었다. 설비투자를 강화해 두 곳에 디지털 작업을 위한 송신탑 시설장비도 현대화했다. 내가 연임 안 돼도 좋으니 내가 있을 때  개선하라고 격려했고 또 모두들 열심히 따라줬다.  성과도 있었다. 다큐 '잡초는 없다’가  7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직원들은 밤을 세워 연구하기도 했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지에 발전기를 들고 갔고 또 청계천에 가서 작은 크레인과 이동차를 만들어 비용을 절감했다. 지역에 큰 행사인 제천 음악 영화제를 맡아 키우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우리가 평생 살면서 직장에서 함께 있는 시간이 제일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직장을 더 즐겁고 서로 위로와 힘을 북 돋아주는곳으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카메라기자의 인격에 관한 것인데 복장부터 말씨 행동 그리고 일을 대하는 자세가 그 누가 봐도 한번 해보고 싶은 직업이 되도록 만들자는 겁니다. 그리고 숙명적으로 펜기자와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나와 함께 하는 이가 잘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는게  필요합니다. 또 세상을 길게 보고 살며. 풍요로운 노후를 위해 낭비하지 말고 계획을 세우고  젊었을 때 몸을 음주로 혹사하거나 무리 하지 말고  좋은 취미를 계발하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가정이 화목해야 하니까 마음을 열고 아내와 자식과 관계를 잘 개선하며 살기 바란다. 퇴직하고 외톨이가 되지 말고 만나는 이 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잘지냈으면 합니다. 카메라기자협회 전임회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카메라 기자의 숫자도 이제  많이 늘었습니다. 1년에 한번이라도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마당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선배는 후배들의 변화를 배우고, 후배는 선배들의 노하우를 익혀 지금보다 더 낳은 카메라기자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을 했으면 합니다. 또 협회 홈페이지에 주소록을 만들어 OB들의 연락처를 알 수 있도록 해 서로 안부를 주고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카메라기자 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정리 : MBC 정연철 기자
    2009-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