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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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릴레이 인터뷰> YTN 하성준 차장
    <이어지는 인터뷰 - YTN 하성준 차장> “영상취재하면 ‘하성준’, 그것이 나의 목표” 1. KBS 김승욱 기자가 하성준 차장에 대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사람, 때때로 궁금해지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며 이어지는 인터뷰 다음 주자로 추천을 했다. 추천을 받은 소감.  글쎄, 우선 그렇게 생각해줘서 승욱이 형에게 정말 고맙다. 요즘 마주칠 일이 없어서 서로 궁금해 하지만 공식적인 인터뷰의 장으로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승욱이 형이 나에 대해 관심(?)이 아직 있기는 하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데 큰 소득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먼저 전화 한 번 걸어온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형, 맛있는 밥을 사시오.” 2. 하성준 차장이 생각하는 ‘김승욱 기자’는?  정(情)이 많은 사람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래서 서로 통했던 것 같다. 승욱이 형과는 1999~2000년 청와대 출입을 함께 했었다. 풀 취재라 가족적인 분위기도 있지만 서로 경쟁해야 하는 관계에서 먼저 출입하고 있던 승욱이 형이 도움을 많이 주었다. 좋은 추억도 많았고, 한때 벗어나고만 싶었던 청와대 출입처를 버티게 해주었다. 얘기하다보니 진짜 보고 싶다. 3.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현재 사건팀 캡을 하고 있다. 타사와 달리 YTN은 캡과 데스크 업무를 한 사람이 소화한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나란 사람에게는 능력외의 벅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에 후배들과 씨름하기로 바쁘기는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서 묵묵한 살림꾼이 되는 것이 목표다. 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름대로 즐기면서 꾸려가려 하고, 건강을 위해 자전거 타고 있다. 4. 카메라기자로 일한지 몇 년이 되었나?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1994년 9월 9일에 입사했으니까, 햇수로 15년이 되었다. 스치는 생각은 많지만, 2004년에 아테네 올림픽 취재를 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유는 타 지상파방송사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이보다 더 최악의 취재환경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였다. YTN은 올림픽 중계권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사로서 올림픽을 취재할 권한이 없었고, 애초에 올림픽 취재를 가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테네 올림픽에서 테러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고. 취재지시가 내려왔지만 위성청약조차 할 수 없었다. 카메라기자 1명과 취재기자 2명의 출장명령은 떨어졌지만, 미디어센터나 방송센터의 출입증, 차량비표조차 없고 송출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내야 했고, 누구도 그 당시 시도하지 않았던 인터넷송출을 떠맡게 되었다. 출장 전부터 각별한 연구가 필요했고, 타사도 경험 없던 일이라 모험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회사에서는 송출이 실패하면 다음날로 서울로 복귀해도 좋다고 했을 정도였다.  아테네에 도착한 첫 날, 올림픽개막전 분위기를 스케치해서 노트북으로 리포트 편집하고 송출을 시도했다가 처절한 인터넷속도(평균 6K, 아테네는 가정집이 56K 전화모뎀을 사용하던 시절이다)에 실망하여 시내 여기저기를 방황하다가 그중 제일 빨랐던 아테네시청기자실에서 평균15K의 속도로 4시간에 걸쳐 첫 완제리포트를 송출했다.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취재기자와 포옹도 하며 자축했지만 불행의 시작이었다. 회사는 하루에 두 꼭지씩 리포트 완제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각종 경기의 리포트, 금메달리포트까지 제작지시를 내렸다. 22일 동안 총 52꼭지의 리포트완제품을 송출하기 위해 혼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9시부터 새벽4~5시까지 일했다. 경기장마다 걸어 다녔고, 지하철을 이용했으며, 입장권을 구입하여 취재했다. 취재기자는 두 명이라 돌아가며 쉬는데 나는 첫 5일은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었고 자판기 냉커피만 마시며 송출하다가 토했던 일은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육체적인 한계와 정신적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이런 취재환경에서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의지의 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좀 심각하고 거창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가장 뿌듯한 기억이다. 이후 현재까지 YTN 뿐만 아니라 지상파방송사도 인터넷송출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모든 선후배 동료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당시에 혹자는 카메라기자가 왜 송출까지 해야 하냐며 혹 붙인 격으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자부심으로 남는 일이다.   5. 카메라기자로서 목표가 있으시다면?  다른 분들 인터뷰 한 것을 보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분, 다양한 목표들이 있으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은 없다. 그냥 기본에 충실한 카메라기자가 되고 싶다. 전에 ‘한국의 악기’라는 영상 시리즈를 한 적이 있었다. 연중 기획인데, 주에 한 편씩 나가기 때문에 52개를 만들면서 느꼈다.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한 우물 열심히 파는, 기본적인 뉴스영상취재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라고. 요즘 훌륭한 멀티플레이어 카메라기자 선후배들이 많지만 난 데일리뉴스취재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다. 아직도 너무 먼 길이지만. 6. 앞으로 계획, 또는 바람이 있으시다면?  가장 큰 바람은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뭐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나는 원래 ‘땡집’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끝나자마자 집에 간다는 뜻이다. 나는 내 가족이 기다리는 집을 좋아한다. 요즘은 업무 때문에 퇴근 후 아이들 얼굴 보기도 힘들지만 캡을 그만하게 되면 다시 ‘가정적인 하성준’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지금 맡고 있는 일(캡&데스크)을 무난히 잘 해냈으면 한다. 그래서 앞으로 이 업무를 맡게 될 다음 캡에게 열심히 하는 사건팀 분위기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웃음)   7. 협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한 가지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긴 하다. 1박 2일로 가족 수련 대회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아무래도 많은 회원이 참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가다보면 정작 회원 간의 친목도모를 위해 무엇을 하기 보다는 가족끼리 지내다 오게 된다. 그러므로 회원들의 친목도모를 위해 토요일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체육 대회’를 했으면 한다. 몸을 부대며 함께 땀을 흘리는 것 이상 친해지기 쉬운 방법은 없다. 회원 간 친목도 그렇지만 각 사 동료들끼리의 결속도 좋아지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 YTN은 협회에서 체육대회 한다고 하면 미리 연습도 할 것이다. 협회에서 그런 장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8. 다음 이어지는 인터뷰 주자를 추천해 주세요!  다음 이어지는 인터뷰 주자 때문에 고민했다. 그래서 지난 인터뷰 주자들이 누구였는지도 찾아봤다. 친했던 동료들을 추천할까, 아니면 능력이 출중한 사람, 인간성 괜찮은 사람, 이야기 꺼리 많은 사람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연배에서는 추천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15년 차 내외의 사람들끼리 릴레이가 되고 있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후배 중에 나는 SBS 홍종수 기자를 추천하고 싶다. 사건 현장에서 자주 만났었다. 웃는 모습이 멋있는 후배이고, 일에 대한 열정과 실력, 그리고 인간미를 함께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 올림픽 취재하느라 고생도 했을 것이고. 다음호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8-09-29
  • 지역사 최초의 여자 카메라기자, 수습을 마치다
    제목 없음 지역사 최초의 여자 카메라기자, 수습을 마치다 “10kg, 그 이상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여자 카메라 기자는 처음 뵙네. 그거 안 무거워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수습기자 생활 3개월. 그 짧은 시간동안 무수히 들은 인사 아닌 인사말. 처음 몇 번은 ‘가볍게’ 웃으며 무겁지 않다고 대답했다. 선배들이 농담처럼 종종 말하는 ‘지역사 최초의 여자 카메라 기자’라는데,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무겁지 않다고 대답하는 나의 문장은 말줄임표를 덧붙인 듯 무거워졌다. 취재를 가는 곳마다 듣게 되는 그 말의 혹은 그 상황의 함의를 서서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물리적 무게가 아니라 그 카메라에 얹힌 내 위치의 무게였다.  내게 있어 방송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평등함”의 매체라는 것이다. 방송은, 그 중에서도 지상파 방송은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보다 잘 그려낼 수 있고 힘든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평등성은 내가 방송을 꿈꾸는 이유가 되었고, 영상 없는 방송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카메라 기자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방송에 대한 고민 속에서 ‘여성’인 카메라 기자에 대해서는 - 솔직히 고백하자면 -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온통 넥타이를 맨 양복 입은 남성들이 대기 중인 것을 보고 ‘어라?’ 했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건대, 그 때 ‘쟤는 뭐지?’라는 시선을 느낀 순간부터는 꼭 ‘여성 카메라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나름의 결연함으로 시험을 치렀던 것 같다. 그리고 부산MBC의 카메라 기자가 되었다. 수습 교육을 받으며 적응하느라 그 결연함은 잠시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2개월을 보냈다. 3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가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다시 느끼게 된 시선 그리고 무겁지 않느냐는 인사말. 나는 - 아직까지는 - 신기한 존재인 ‘여성 카메라 기자’인 것이다. 더구나 지역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지금은 무겁지 않느냐는 인사말에 속으로 대답한다. 무겁다고. 이깟 10킬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니 정확히 말해 여자인 내가 얼마나 잘 해내는 지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눈빛이, 여기저기서 카메라 기자를 향해 달리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꿈이 내 어깨에 함께 얹혀 있는 것만 같아 꽤 많이 무겁다고. 하지만 그 기분 좋은 무게감에 나는 결연해진다. 아직은 아주 많이 어설프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카메라 기자가 되리라 두 주먹 불끈 쥔다.  10kg, 그 이상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이제 시작이니까. 우현주 / 부산MBC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9-29
  • 중국 자국(自國)만의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취재하고 중국 自國만의 올림픽  2008 베이징올림픽이 17일간의 열전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안전 강조와 철저한 통제 속에 외형적으로 한없이 화려했던 올림픽.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환경오염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베이징올림픽을 치루기 위해 중국당국이 투자한 총130억위안(약1조8000억)을 들여 인공강우로 비를 내리는 마법을 연출해 여타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깨끗한 도시로 탈바꿈시키며 올림픽개최에 온 힘을 기울인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외교, 정치, 문화, 경제, 미디어 모든 부분에서 직접 비교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이번 베이징올림픽은 상당히 치밀한 준비를 한 대회였다. 경기 진행이나, 운영,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양과 질, 아테네 대회보다 훨씬 더 준비하고 잘하려고 노력한 올림픽이었다. 특별히 신경 쓴 게 테러 방지, 안전 이런 점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방송, 언론취재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올림픽 참여를 어렵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통제도 심했고, 외국인들도 비자 제한, 곳곳에서 신분증 검사, 검문검색 받느라 취재를 하는데 버거움이 많았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은 표를 많이 뿌린 탓도 있다. 표는 다 팔렸다고 했는데 경기장에 사람이 안 차니까, 스폰서 회사 및 각종 기업들에 표가 들어갔다고 한다.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가 맞붙은 축구 결승전에는 현지 모 법인을 통해서 표가 많이 돌아다녔다.  대회 내내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올림픽을 보기 위한 일반 관중,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아니면 베이징 사람들이든 다른 지역 사람들이든 그 사람들이 실제로 올림픽을 즐길 기회가 박탈된 셈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추구하는 올림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나치게 안전만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참여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실정에 맞는 고육책이라는 평가가 중국 내부에 있다고 현지 특파원을 통해 알게 됐다.  일부에서는 그래서 이번 올림픽을 1936년 베를린올림픽과 비교하는 시선들이 있다. 당시 베를린올림픽은 나치 정부의 홍보수단이지 않았나. 이번에도 중국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지나치게 반영됐다. 베를린올림픽에서도 독일이 메달 수 1위를 하지 않았나. 중국도 1위에 집착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내셔널리티는 의미 없을 수도 있다.  올림픽 헌장 제1조에 올림픽운동의 목적은 청년들에게 아마추어 스포츠의 기조를 이루는 육체적 노력과 도덕적 자질을 일깨워주고 동시에 4년마다 행해지는 이해관계를 떠난 우호적인 경기대회에 세계의 경기자를 모이게 함으로써 인류평화유지와 인류애에 공헌하는데 있다고 밝혔고, 4조에는 올림픽경기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은 하나의 도시에 주어지는 것이지 하나의 국가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천명했다.  베이징 올림픽슬로건 one world, one Dream은 세계는 하나 ,꿈도 하나라고 해석하지만, 안타깝게도 올림픽기간 중 이슬로건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Different world, Different Dream이라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데 한 몫을 한 것 같다. 이번에도 세계인류는 서로의 이념의 차이를 보여준 현실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one world, one Dream의 베이징 올림픽에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에서 공통된 목표이자 희망인 평화를 위한 열쇠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런던올림픽을 기대하며...... 양준모 /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9-26
  • 베이징과의 만남
    2008 베이징올림픽을 취재하고 베이징과의 만남 #1. 베이징으로  “내일 당장 출발해야겠다!” 동행하는 선배기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올림픽이 열리는 베이징의 모습을 담기위해 비행기를 타기는 해야겠지만 마음에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직스런 출발결정에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집으로 전화해 출장준비를 아내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우리는 어느새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덥고 습한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 쉽진 않겠군!’ 베이징의 첫인상은 그렇게 걱정 반, 호기심 반이었다. #2. 베이징 사람들  넓은 도로와 원활한 소통으로 베이징의 교통상황은 평소에도 매우 양호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부제의 실시와 올림픽 관련차량의 전용도로제 실시라는 현지 코디의 설명을 듣고 불편해도 참는 베이징 시민들의 올림픽에 대한 성공개최의 열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지낼수록 그것은 중국인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공산당의 획일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은 당의 명령이 절대적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언론통제가 어디에서나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당의 명령에 의해 낡은 집이나 상점들은 올림픽을 선전하는 대형 가림판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물론 베이징 시내의 곳곳이 재개발과 재정비로 베이징 사람들이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강요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게앞에 대형 선전판이 가리고 있어 장사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의 경우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 역시 당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절대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당의 통제하에 중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애국심이 고취되고 또한 어린시절부터 주입된 중화사상의 교육으로 자신의 민족에 자부심을 느끼며 민족에 반대되는 사람이나 집단은 철철하게 배척해야 되는 존재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동북아공정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베이징 시내 한복판에서 커다란 벽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한반도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주변 열강들은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음에 우리 모두가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3. 중국의 음식  중국은 그 땅덩어리 만큼이나 음식에 대한 가지 수와 요리방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위생관념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서의 생활이 나에겐 쉽지만은 않았다. 사실 처음엔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거나 일로인하여 체류를 해야 할 땐 그 나라의 음식을 먹으며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며칠 동안은 중국음식을 선호했었다. 하지만 어느 식당에서 들어갈 때부터 느껴진 이상한 냄새는 결국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비위가 상한데다 메뉴판에 나온 머리 달린 비둘기 요리는 당장이라도 그곳을 뛰쳐 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홍콩에 여러번 다녀왔지만 그곳에선 자라탕을 제외하곤 느껴보지 않은 괴로움이라 정말 며칠은 상당히 힘들었다. #4. 짝퉁시장  올림픽이 열리던 베이징 시내의 표정을 담아오던 우리는 중국의 짝퉁시장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이태원이나 남대문에서도 몰래 접할 수 있는 짝퉁은 중국에선 올림픽 전엔 거의 내놓고 팔다시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중국 짝퉁시장에 단속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고 상인들은 조심스런 반응이었다. 베이징의 짝퉁상점이 밀집되어 있는 곳 중에 한곳인 ‘슈슈이제’를 들어가니 조용한 목소리로 ‘프라다!’,‘구찌!’라는 말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일단 한번 보자!’ 상점으로 들어가니 책자를 보고 고르란다. 한참을 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선택하니 한 남성이 물건을 갖고 왔다. 물건은 남자인 내가 봐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래! 좋다!’ 바로 가격흥정에 들어갔다. 물론 손에 들린 소형 카메라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부른 가격 중국돈 1800원..... 두사람 사이에 머리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제시한 가격 600원..... 펄적펄적 뛰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봅시다.’ 나가려고 하니 일단 1400원으로 가격이 내려갔다. ‘그래도 물러서면 안돼지!’ 다시 600원을 제시하고 나가려고 하자 가격이 1000원까지 내려갔다. 이번엔 조금 양보해서 700원.... 결국 몇 번의 흥정에 750원에 합의를 봤다. 두 번째 상점에선 아예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니 여행용 가방 몇 개를 가지고 와서 흥정을 시작했다. ‘어라! 이거 점점 재밌어지네!’ 열심히 물어보고 다시 흥정도 시작 되었다. 그들은 물건을 팔기위해 열심히 설명했고 난 열심히 그들이 알지 못하게 취재하고 있었다.  송출을 하고 뉴스가 나가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후 다시 한번 생각하니 짝퉁시장에 열광하는 우리네 모습에 조금은 씁쓸했다. 일본인의 경우 짝퉁시장에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선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짝퉁이 팔린다는 것은 우리들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허영심에서 출발하는 그릇된 행동이 아닐까 생각했다.          #5. 베이징! 안녕!  길고긴 출장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이도시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과 길었던 시간이지만 베이징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마지막날 열리는 경기를 관전하려 주경기장으로 몰려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베이징올림픽을 아쉬워하고 있는 듯 했다.  폐막일 다음날 공항엔 출국하려는 기자들과 관광객으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입국하던날 반갑게 맞이해 주던 안내봉사요원들도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었는지 분주해 보였다.  이번 대회를 취재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났다. 박태환 선수의 금메달에 좋아하던 교민들! 또 단 1패도 없이 결승에서 쿠바를 누르자 경기장 주위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환호하던 우리 동포들! 또 판정시비를 딛고 일어나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우리의 아줌마 핸드볼 군단의 투혼이 베이징을 떠나며 인천으로 향하는 배행기에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손엔 나를 기다리는 아들에게 건네줄 올림픽 마스코트 징징이를 들고서… 조성범 / OBS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9-26
  • 나흘 간의 교훈
    2008 베이징올림픽 취재를 다녀와서 나흘간의 교훈  8월 5일 베이징 수도공항. 중국세관이 길을 막는다. 주파수허가서(Frequency License)없이는 무선마이크를 반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계권이 없기에 우린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대사관에 취재비자 신청할 때 별다른 추가 지침도 없었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비를 맡기고 올림픽위원회의 허가서를 가져와 찾아가란다. 같이 세관심사 받던 MBC기자들과 외국의 기자들도 난감해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유선으로 취재는 가능하지만 장비를 놔두고 간다는 것 자체가 안심이 되질 않았다. 갱지 같은 곳에 한자로 휘날려 몇 자 적은 보관증을 내어주는 것을 보고 불안은 더 커졌다. 1시간가량의 실랑이를 접고 일단 공항을 나섰다. 취재기자와 단둘이 간터라 무선마이크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전화를 넣었다. 베이징올림픽위원회에서는 이미 무선허가신청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힘들겠지만 일단 BIMC(Beijing International Media Center-이곳은 IOC카드를 받지 못한 외국의 언론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모회사 신문 특파원을 통해 사전에 신청해 비표를 받았다)들려보라는 안내를 받았다. 다음날 신청과정도 싶지 않았다. 평소에 쓰지도 않을뿐더러 알지도 못하는 주파수 대역폭, 정격출력 레벨, 주파수 특성 등을 요구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우리가 쓰는 장비의 주파수 대역이 현지경찰이 사용하는 대역이라 힘들겠다는 답변이었다. 더 이상 매달릴 시간이 없었기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기 작성된 신청서와 당국에 협조를 바라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곤 사흘 후 불현듯 연락이 왔다. 허가서가 발행되었으니 찾아가시란다. 허가서를 보니 주파수대역도 자기들이 임의로(?) 변경해 발급해주었다. 그들로서는 외국에서 온 취재진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아닌 배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입국하기 전날 발생한 신장지역의 테러로 인한 보안강화조치라고 했다. 이전에도 그렇고 다 다음날 입국한 다른 취재진은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고 하니... 내가 입국한 날이 장날이었다.  이번엔 공안이 길을 막는다. 도착후 숙소에서 인터넷을 뒤지며 취재정보며 지리 정보 등을 파악하고 있을 무렵 한 중국인이 문을 두드린다. 공안이다. 중국어로 뭐라뭐라 하는데 통 알아들을 수 없다. 여권과 비표 등을 내밀었지만 소용없다. 통역에게 전화해 알아보니 호텔이외의 지역에서 외국인 거주할 경우(우리는 아파트를 대여했다) 24시간 이내 관할서에 외국인거주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일어나자마자 신고하러 가겠다고 했다. 큰소리로 뭐라뭐라 하는 통에 이웃주민들 나오고... 아파트 관리인 올라오고...  자, 이제 본격적인 취재다. 애초에 냐오차오(새둥지) 내부는 취재가 안 되니 3만발 이상의 불꽃이 터지는 베이징 시내풍경과 시민들의 반응을 담기로 했다. 개막식 시작인 오후 8시경 천안문. 인산인해로 거리를 가득매운 베이징 시민들 틈에서 불꽃을 기다리고 있었다. “펑”드디어 시작인가? 윽. 이럴 수가! 이후로 30분을 기다려도 불꽃은 터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소위 ‘발자국’이라는 불꽃 한발이었다. 개막과 동시에 수많은 불꽃이 하늘을 수놓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예서 머무를 시간이 없다. 개막식 종료직전에 냐오차오에서 나오는 불꽃을 담아야 했다. 하지만 이동도 만만치 않았다.(당시 우린 택시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교통통제로 차들은 먼거리를 돌아가고 있었고 그나마 택시도 쏟아져 나온 중국인들로 빈차를 잡을 수 없었다. 30분을 걸었지만 거리의 시민들은 좀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국이 인구대국은 맞긴 맞나보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 끼어 타고 외곽으로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주경기장 쪽으로 접근했다. 가는 도중 차창 밖으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내 속도 같이 터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도착해 번갯불에 스탠딩 굽고 인터뷰도 굽고...  이후에도 예상치 못한 일들은 벌어졌지만 처음 나흘간의 교훈을 바탕삼아 유연성을 발휘해 큰 탈없이 취재를 마치고 귀국했다. 올림픽취재는 개인은 물론 회사도 처음이었다.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길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쉬운 것은 비중계권 방송사가 취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해 다양한 그림과 기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역시 경험하지 못했다면 준비가 최선인 것 같다. 김재헌 / mb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9-26
  • <대담> 올림픽 취재, 이대로 좋은가?
    올림픽 취재, 이대로 좋은가?  지난 2일, 여의도에서 ‘올림픽 취재,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대담이 이루어졌다. 이번 대담에는 본지 편집장인 MBC 장재현 기자와 박동혁 기자, 그리고 SBS 조정영 기자가 참여했다. 대담 참석자들은 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 경기를 취재하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에 대해 기탄없는 얘기를 나눴다. 그럼,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재현 : 나도 이번 올림픽 취재를 갔었지만, 무리한 취재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관중석에 들어가 취재를 한 것 때문에 경고도 받고, AD카드를 뺐기기까지 한 방송사도 있다고 들었다. 내 경우 올해는 외곽 취재를 맡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지만, 예전에 관중석에 ENG까지 가지고 들어간 적이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의 방송환경상 쉽게 개선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조정영 : 사실 나는 이번 베이징올림픽 취재는 가지 않았다. 지난 아테네올림픽과 시드니올림픽 취재를 갔었기 때문에 역시 그런 경험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감독이 심했던 것 같다. 나도 관중석 안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었는데, 아테나나 시드니 때는 전혀 제지가 없었다. 제지를 하지 않는다고 정해진 룰이 있는데 어겨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스포츠 취재 문화가 그렇게 자리를 잡았고, 뉴스 스타일 역시 다양한 화면 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동혁 : 그렇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취재가 관행처럼 됐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기자들도 취재 경쟁 때문에 타사에서 하면 안 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문제를 덮고 넘어가면 모르겠지만, 촬영하다가 들켜서 쫓겨난다거나, 우리 뉴스에 나간 영상을 보고 IOC에서 문제를 제기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전에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재현 : 정해진 룰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해 나간다면 결국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도 못 막을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취재 문화가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가 익숙해져 있다고 해서, 잘못된 일을 계속 해서는 안 된다.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고, 조금씩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정영 : 몰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생긴다. 만일 우리 카메라기자만 취재를 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행사가 있으면, 우리보다 더 열을 올리는 쪽이 제작파트이다. 우리가 취재를 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제작파트든 어디든 좋은 그림이 확보됐다면 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방송사 차원의 합의가 있지 않는 한 이것은 무슨 수로 막겠는가? 박동혁 : 분명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해서 그것이 국제적인 차원으로 부각이 됐을 때, 그로서 파생되는 국가 명예 실추, 또 한국 언론인에 대한 신인도 하락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선은 우리 카메라기자만이라도 규칙을 준수하면서 취재에 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로는 굳이 관중석에 들어가서까지 찍은 영상을 써야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면 내가 취재한 뉴스는 다양한 화면을 시청자에게 보여줄 수 있겠지만, 나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관객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나라 취재진들은 그렇게 편법으로 취재하지 않고도 뉴스를 잘만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볼 대목이다. 장재현 : 그렇다. 생각해볼 대목이다. 관중석까지 들어가 편법으로 취재하는 것이 카메라기자만은 아니지만, 우리부터라도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조 선배말도 맞다. 좋은 그림이 있으면 쓰게 마련이고, 좋은 그림을 확보할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 접근하는 것 또한 카메라기자의 생리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서 나라 망신을 시킬 수 있는 일을 알면서도 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선수 가족이나 관중들의 반응이 꼭 뉴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나뿐 아니라 시청자도 그런 부분을 궁금해 할 것 같지 않다. 조정영 : 한 번 상상을 해보라. 우리에게 주어진 중계 그림만 가지고 나가는 뉴스를…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나는 우리 시청자들도 다양한 그림이 있는 뉴스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우리 국민이 이미 그런 뉴스에 익숙해진 탓이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것을 바꾸는 것은 익숙해지게 하는 것보다 10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제히 무엇인가를 해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스포츠 취재에 대한 교육을 시켜서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해 인지를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계속적으로 교육을 하면 ‘세뇌’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에 각인이 되기 때문에 조금 씩 조금 씩 바뀌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박동혁 : 사실 알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몰라서 하는 경우도 많다.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더 조심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선은 취재를 하러 가는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에 베이징에 가서도 느낀 것이지만,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베이징 취재를 오기 전에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취재 규칙’을 받아 한 번씩 검토만 하고 왔어도 헤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계속적인 교육이 어렵다면  출장 대상자에 대해 미디어 규정을 숙지시키는 과정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장재현 : 맞는 말이다. 어차피 한 번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식’을 시키면서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교육 대상을 카메라기자에 국한시키지 말고 함께 취재를 가는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규칙을 카메라기자만 알고 있을 경우, 취재 파트와 불협화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는 어느 일방의 생각대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 대한 공유가 필요한 것이다. 조정영 : 그렇다. 타사 뉴스에는 나간 영상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취재 파트에서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 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전혀 모르고 있다면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교육이 필요하다면 취재에 함께 하는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박동혁 :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언론인들은 ‘우월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도 모르게, 아마 그런 것이 몸에 밴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관중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면서 REC 버튼을 눌러대는지… 본인이 국민의 눈을 대신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자부심인지, 암튼 대담하다. 나 역시도 관중석에 들어가서 취재를 했지만 일단 카메라를 잡으면 왜 이리 뵈는 것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면 주위의 관중에게 미안해하고 그들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말이다. 기자들의 마인드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장재현 : 사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통로가 좁아서 두 단 정도 아래의 넓은 통로로 내려가 위쪽이 있는 취재기자를 따라가며 촬영을 하자니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그 경기를 보려고 돈을 지불해 가면서 그곳까지 왔는데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우월 의식’을 가진 언론인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조정영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온 국민이 시청하는 공중파 뉴스를 만드는 카메라기자가 피사체도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할 수는 없지 않나?  지난 번, 올림픽 선수단이 입국할 때 일이다. 그날 공항으로 취재를 갔었는데, 선수들을 보겠다고 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뚫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 때 어떤 아주머니가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저씨, 나는 ○○○ 선수 보려고 네 시간 전부터 여기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라고. 그래서 나는 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주머니, 제가 찍어 가면 온 국민이 보는 뉴스가 돼요. 그러니까 양해 좀 구합시다!”라고 말이다. 그 아주머니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 때 내 머릿속엔 온통 시청자의 눈을 대신해서 왔으므로 제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은 가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박동혁 : 맞는 말이다.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기본인데, 그 조차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기자도 방송이라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샐러리맨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 그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지… 대형 경기 미디어 규정에 대한 교육뿐 아니라 서비스맨으로서 갖춰야 할 서비스 마인드에 대한 교육도 필요할 듯싶다. 장재현 : 그렇다. 그런 부분도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서비스 마인드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이보다 큰 문제가 또 있나? 시청자가 바로 고객인데, 고 품질의 영상으로 서비스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과 대면했을 때 역시 ‘서비스 맨’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의 결론은 ‘교육’인 것 같다. 교육을 통해서 차츰 바꾸어 나가는 것,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언론인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언론사와 방송 직능 단체가 할 일일 것이다.  장재현 기자의 마무리로 대담은 끝이 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청자가 궁금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자 정신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킬 것은 지킬 줄 아는 언론인’이 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지킬 것은 지켜줘야 탈이 없다. ‘큰 탈’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취재진들의 생각과 행동 변화가 필요하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8-09-26
  • 구천을 맴도는 금정굴 영혼
    제목 없음 취재팀은 서울대학병원 법의학센터로 향했다. 오늘 취재는 6.25전쟁 중 발생한 유골이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10년째 서울대 병원에 방치되어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다. 법의학센터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부검 실 팻말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몸이 서서히 움츠려들었다. 부검 실 내부는 바닥과 벽이 온통 하얀 타일로 덮어져있었고 부검 실 중앙에는 스텐레이스로 된 2개의 부검 대가 썰렁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부검 실이라는 장소를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너무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검 대 위에는 작은 배수 구멍이 수도 없이 뚫어져 있었고 아래는 군데군데 여러 개의 수도꼭지가 달려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부검 대 위의 조명등과 바닥의 촬영기구들이 하얗게 먼지를 뒤 집어 쓰고 있었다. 부검 실 옆방에는 내용물을 알 수없는 수많은 유리병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대략은 짐작이 가지만 자세히 들여다 볼 용기는 차마 나질 않았다. 우리가 취재할 장소는 바로 부검 실 옆방에 있는 유골 안치실이다.   6.25 전쟁 당시 금정굴(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소재) 사건으로 발생한 유골170여기가 이곳 10평 미만의 좁은 방에 빼곡히 쌓여있었다. 금정 골 유해는 철재 4단 선반에 보관되어있는데, 맨 위에 머리 부분을 시작으로 아래로 골반, 팔, 다리뼈 순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임시 안치실은 항온, 항습 장치가 없는 일반 실험실이어서 유해 보존 상태가 열악해 보였다. 이곳을 관리하는 L 교수는 유해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는 요즈음처럼 DNA 검사가 일반화 되지를 못하였고, 현재까지 이런 식으로 유해가 관리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취재팀에 토로했다.   금정굴 사건은 지난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한 달여에 걸쳐 고양·파주 일대에서 북한군 점령 하 인민위원회 등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아래 1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경찰과 우익단체들에 의해 불법 연행된 후, 고양 금정 굴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들과 부역혐의와 무관한 주민들이고 희생자 중에는 10대가 8명, 여성이 7명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금정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정부 조직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위)가 지난 2005년 발족했다.   진실위는 "비록 희생자 가운데 일부가 부역자나 부역혐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관련 법령 및 규정에 따른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총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설명했다.   진실위는 재발방지를 위해 제반 법률 개정과 경찰 대상 인권교육, 역사관 건립 등을 추진할 것과 유해 봉안, 적절한 위령시설 설치 등 화해와 위령사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위의 이러한 권고가 작년 2007년에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진실위가 내년 2009년이면 위원회 활동임기가 만료되고 조직이 와해될 처지에 놓이게 되어 유가족들을 더욱 애타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을 깨끗하게 매듭지어야할 해당 정부부처의 무관심이 금정 굴 사건 영혼들을 구천에 맴돌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안치실은 마치 의대생을 위한 유골 전시장 같았다. 그동안 여러 취재 현장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유골을 촬영해보기는 처음이다.   갑자기 ‘킬링필드’의 영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촬영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촬영할 때 피사체를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파인더를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덜 긴장 된다. 왜냐하면  파인더가 사물을 무채색으로 바꾸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L 교수 인터뷰를 준비했다. 막 인터뷰를 시작하려던 순간 L 교수는 “ 안치소에서 인터뷰하기는 처음입니다. 혹시 유골을 배경으로 한 인터뷰 장면이 편집과정에서 빠질지도 몰라요.” 라고 한다.   그렇다!   부검 실이라는 공포의 현장에서 놀라 도망쳤던 나의 도덕적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무리 현장감을 강조하는 카메라기자지만 유골을 배경으로 한 인터뷰는 아무래도 심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안치실 밖으로 나와 다시 인터뷰를 했다. 하마터면 애써 녹화한 인터뷰가 사장될 뻔하였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부검 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추석을 며칠 앞둔 유족들이 이곳에서 차례를 지내기 위해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마치 친척집을 방문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검 실을 들어선다. 유가족인 M 할머니는 가져온 음식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검 대위에 올려놓고 태연히 부검 실 세척 대에서 과일을 씻기 시작한다.   “남들은 추석이라고 멋진 장소에서 차례 지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라며 할머니가 취재팀에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좁은 안치실에서 즉석 차례 상이 차려졌다. 사과, 배, 막걸리 등으로 소박하게 꾸며진 차례 상이 준비되자 유족들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다. 차례를 마친 유족들은 막걸리로 음복을 하고, 제사 술을 유골 주변 이곳저곳에 뿌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 L 교수로부터 최근 유해 보존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는 얘기를 들은 후라, 항온, 항습 장치가 없는 안치실에서 술을 뿌리는 것도 유해 보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M  할머니와 유족들은 우리 취재팀에게도 음복을 권하고 차례 지낸 떡과 과일을 나누어준다. 나는 단지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부검 실을 나왔다. 취재차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 따르던 L 기자가 “선배! 유가족 분들이 먹으라고 준 음식 이예요”라며 양손 가득 음식물을 들고 있었다.   유가족들이 처음 이곳 부검 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기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란 모진 세월이 그들의 감각기관 마저 이처럼 무디게 만들어 놓았다. 부검 실이 주는 혐오감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혐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과거 50년 동안 부역자라는 멍에에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온 유족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부모, 형제가 쓰러져갈 때, 흘렸던 눈물은 이제 더 흘릴 눈물조차 없이 말라버렸다.   이제 남은 유족들의 수도 얼마 되지 않고, 워낙 고령인지라 그들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이제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다. 금정굴 사건이 더 이상 그들만의 아픔과 상처로 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취재하는 줄곳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화방송 보도국 영상취재2팀 서영호 * 위의 내용은 ‘한 맺힌 차례 상’ 이란 제목으로 지난  9월 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방송 되었습니다.
    2008-09-19
  • <줌인> "카메라기자의 눈, 더욱 날카롭게 빛나야 할 때"
      “카메라기자의 눈, 더욱 날카롭게 빛나야 할 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  두 계절이 미처 지나가지도 않은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통령 최측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지상파 및 보도·종합편성 채널을 허용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 구본홍 YTN 사장 날치기 임명, KBS 이사 강제 교체, MBC PD수첩 징계, 네티즌 실명제, 사이버 모욕죄 신설 추진, KBS 정연주 사장 해임 요구, 등 여론장악의 일방통행은 날이 갈수록 심화(深化, 깊어짐) 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언론만이 문제는 아니다. 경찰관기동대, 폭력진압, 대량검거 등의 공안정국 양상(樣相, 생김새나 모습)에서부터 대통령 친인척이 공천 청탁수수사건으로 구속되는 사건까지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모든 분야에서 과거 권위주의 독재 권력의 행태를 닮아있다. ‘섬뜩한 과거로의 회귀(回歸, 도로 돌아오거나 돌아감)’를 걱정하는 이유다.  권력 감시는 언론의 본분(本分, 의무로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이다. 감시의 본분을 잃어버린 언론은 언론일 수 없으며, 언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국민에 대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관습적으로 행하여오던 POOL문제에 대한 협회의 준칙이 발표되었다. 열악한 취재환경과 부족한 인원문제를 임시방편으로 막아왔던 POOL제도가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분명 고통은 따르겠지만 한편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있다. 카메라기자가 지켜 온 현장, 그 현장은 오늘의 역사다. ‘섬뜩한 과거로의 회귀’를 우려 하는 이때, 우리는 언론의 주체로서 바른 언론을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언론인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각 사를 대표하여 이 역사의 현장을 지킨다면, 카메라기자의 위상은 다시금 자리매김 할 것이다.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관심이 비켜있는 역사의 현장을 감시하는 카메라기자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나야 할 때다.
    2008-09-01
  • 6자 회담 취재, 이렇게 했습니다. "mpeg2 파일로 송출"
    < 6자회담 HD POOL취재 이렇게 했습니다 > “4개 사의 합의 통해 mpeg2 파일로 송출”  지난달 9일부터 13일까지 4박5일간 중국 북경에서 6자회담이 열렸다. 이번6자회담에서는 KBS, MBC, SBS, YTN 4개사가 HD카메라를 이용한 풀 취재를 하였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취재와 인터넷송출을 마칠 수 있었다.  현지 풀 취재단의 취재 및 송출방식을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IT기반의 풀 취재와 송출에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취재장비와 송출방식을 결정하기위해서 회담출발 몇 일전 풀 카메라기자 간 미팅을 가졌다. 전화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힘들기 때문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HD카메라는 각사의 사정에 맞게 준비하기로 했다. KBS, SBS는 소니 XDCAM350을 MBC, YTN은 파나소닉 P2를 사용하기로 했다. 다음은 촬영원본을 웹 하드에 올릴 때 최종적인 파일포맷을 결정하는 것인데 각 사간에 이견이 있었다. SBS, YTN은 HD방송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굳이 용량이 크고 업로드시간이 오래 걸리는 HD화질을 원하지 않았고 KBS와 MBC도 서로의 mxf파일이 호환되지 않았다. 그래서 4개사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mpeg2방식으로 업로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청와대 팀에서 해외에서 mpeg2파일로 송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4개사 모두 흔쾌히 수용했다.  HD화질로 송출하지는 못했지만 불안한 중국의 인터넷속도와 1시간 느린 시차를 고려했을 때 파일사이즈를 줄여 제시간에 그림을 송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9시뉴스를 기준으로 북경현지시간 19시까지는 모든 송출이 완료돼야 했기 때문에 풀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노트북 앞에서 각자의 원본을 송출하기에 바빴다.  다행히 프레스센터에 전용선이 설치되어 1mbps 이상의 속도가 나왔지만 기자들의 기사와 그림 전송량이 집중 될 때는 속도가 순간적으로 다운되기도 했다. 촬영원본을 랜더링해서 파일로 만드는 방식은 각사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본인이 촬영한 원본은 본인이 책임지고 송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K는 베가스8.0을 이용했고 M은 P2모바일 데크와 아비드를 이용했으며, S는 피나클, Y는 에디우스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mpeg2파일을 만들었다. 편집 툴은 서로 달랐지만 최종 포맷을 mpeg2로 통일했기 때문에 각 사 영상편집팀에서 편집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출발전 테스트용 파일을 각자 업로드해서 체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원본카피는 외장하드를 통해 비디오클립을 넘겨주거나 소니 PDW-F70데크의 HDSDI입출력 단자를 통해 디스크에 카피했다. 해외 출장 시 항상 외장하드나 USB를 가지고 있으면 비디오클립의 카피와 공유가 용이할 것이다.  각 사의 기존 웹하드는 보안상 아이디, 패스워드를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6자회담 기간 중에 업 로드할 공동의 웹 하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청와대 웹하드 2개중에서 KT웹하드를 6자회담 기간 중에만 사용하기로 했다. 용량은 2기가로 작지만 mpeg2를 업로드하기에는 충분했고 부족한 저장 공간은 오래된 파일을 그때 그때 삭제하여 확보했다. 웹 하드안의 폴더는 5개(공동폴더 1개와4개의 전용폴더)로 나누었다. 공동폴더에는 다시 날짜별 폴더를 만들어 4사가 공유하는 그림과 인터뷰를 업 로드했고  4개의 전용폴더에는 각 사의 기자멘트와 스탠드 업을 업로드해서 편집자의 혼란을 방지했다. 파일전송의 시작과 종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평한 송출조건이었기 때문에 취재팀 안에서의 불협화음과 불만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최종 업 로드할 파일포맷만 정해지고 공동의 웹 하드만 있다면 인터넷을 이용한 풀 취재는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전송속도만 담보된다면 HD고화질의 송출도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획적인 풀이든 현장상황에 따른 돌발 풀이든 풀 취재가 완전히 없어지긴 어렵다고 본다. 테이프리스 카메라와 인터넷송출이 일반화된 지금의 취재환경에서는 오히려 화면공유가 손쉬워졌고 풀의 유혹도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카메라기자의 풀 취재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한국의 방송사보다 뜨거운 관심을 가지며 한 개 방송사가 4,5개의 촬영팀을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일본의 언론을 보면서 내심 부러웠다. 이영재 기자 picture@kbs.co.kr
    200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