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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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전거로 스트레스 한방에 날려요!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Ⅱ> 자전거로 스트레스 한방에 날려요!  스트레스는 흔히 만병의 근원, 현대인의 고질병이라고 말한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항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스트레스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24시간, 365일 한 순간도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왕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스트레스라면 이놈을 잘 요리해서 내 편으로 만드는 것도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만, 나는 스포츠 마니아다. 어렸을 때부터 가리지 않고 여러 운동을 좋아했고, YTN 운동부라고 할 만큼 회사 내 여러 가지 동호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고 있다. 야구, 농구, 축구 등 여럿이 함께 몸을 부딪치며 땀을 흘리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구기 종목은 혼자 할 수 없고 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지금 당장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혼자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찰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자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는 자전거를 끌고 달려 나간다. 마누라는 야구나 축구를 하지 않으면 자전거까지 끌고나가는 내게 제발 집에서 좀 쉬라고 닦달하지만, 난 내 몸을 움직여야만 스트레스를 풀게끔 만들어진 것 같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한강에 나가보면 출퇴근뿐만 아니라 이른 아침이나 주말에 자전거로 건강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평소에 잘 하지 못하는 운동을 출퇴근 자전거로 보충해볼 생각으로 자전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보고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자전거, 특히 MTB(Mountain Bike, 산악자전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생활자전거에서 전문가용 MTB로 눈이 높아졌지만, 그만큼 자전거의 성능과 안정성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동네 주변에서 시작하여 한강변을 달리기 시작할 즈음, 산악 라이딩에 욕심이 생겼다. 인터넷 동호회에서 산악 라이딩에 대한 글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멋지게 산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드디어 첫 산악 등정! D-day는 6월 3일 일요일, 서대문에 있는 안산이 첫 라이딩의 목적지였다. MTB를 마련한 지 2주 만이었는데, 2주 동안 각종 자료에서 얻은 산악 라이딩에 대한 첫 시험의 날이었다. 위성사진으로 등반 코스를 숙지하고 갔지만, 코스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갔다기보다는 거의 끌고 밀고를 반복하며 수직 암벽 등반을 한 셈이었다. 한참을 헤매던 중에 다행히 임도를 발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등산로이기 때문에 중간 중간 나무나 돌이 너무 많아서 조금 타다 끌고 타다 밀고를 또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3시간의 사투 끝에 안산 거의 정상에 위치한 무악정에 도착하여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후 산을 내려가는 다운힐(Down Hill)은 처음 맛보는 기분이었다. 일반 도로와는 다르게 미끄러지면서 내려가는데, 다소 위험한 듯하지만, 스릴 만점이었다. 이 맛에 산을 타는구나, 낚시의 손맛이나 폭포수 밑의 득음이 이런 깨달음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날아갈 듯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내려가는 길은 5분도 채 안 걸렸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일에 대한 집중력도 좋아진 기분이다. 몸의 건강은 물론 정신도 날로 맑고 깨끗해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터득해 가고 있다. 특히 산악 라이딩은 자전거와 등산의 효과를 한꺼번에 누릴 수 있으니 1석2조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국토순례 아니 더 나아가 세계 일주를 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이동규 /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7-07-20
  • 스트레스 쌓일 때, 폭탄주보다는 와인을
    제목 없음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Ⅳ> 스트레스 쌓일 때, 폭탄주보다는 와인을!  요즘 와인 열풍이다. 전 세계 시장에서 한국이 판매 매출 성장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럴만 하다. 원래 술에 대한 관용과 문화가 깊은 나라라 한 번 불이 붙으면 감히 어느 민족이 우리를 당할 수 있겠는가? 위스키, 소주 같은 주류와 달리 와인은 이를 둘러싼 말이 많은 술이다.  전 세계 와인의 생산량은 2006년 기준 177,000,000병이나 될 만큼 그 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맛과 향이 제각각 이라는 점에서 호사가들의 이야기 거리가 된다. 와인의 품질은  포도의 재배 위치와 풍토, 서리가 내리는 시기, 바람, 일조량, 품종 등 자연적인 환경에 기본적으로 좌우되지만 결국 농사꾼의 땀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의 포도농가는 마케팅에서 실패하여 특정 동네 사람끼리만 값싸게 즐기는 훌륭한 와인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가격대비 우수품질의 와인을 발견하게 되면 와인 애호가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이런 점에서 아르헨티나의 멘도사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회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아르헨티나는 칠레와는 달리 와인 생산량의 90%을 자국 내에서 소비하고 10%만 수출한다. 칠레는 이 반대다. 자국민의 대부분이 유럽에 바탕을 두고 있고 여기서 건너온 전통적인 와인제조 기술로 제조된 와인들이 많다. 또 무엇보다 프랑스나 미국와인보다 품질대비 가격이 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호사가들이 아무리 입방아를 찧어도 와인은 술의 한 종류일 뿐이다. 건강음료가 아니다. 많이 마시면 취하고 숙취 또한 어떤 술보다 오래 간다. 그래서 적당히 마셔야 한다. 와인은 단독으로 마시기 보단 식사와 함께 하면 그 맛이 배가된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음식물을 잘 소화시켜주는 김치와 같은 의미로 인식돼 있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법은 음식의 성격에 좌우된다. 소스가 강한 음식을 먹을 때 미묘한 향을 풍기는 라이트한 피노노와 품종 와인을 곁들이면 그 와인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맛은 싸구려로 전락한다. 음식과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거나 혹은 음식의 기를 누를 수 있는 와인이 제격이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도 특별히 좋아하는 와인이 없다면 마트보단 와인 전문가가 있는 전문점에서 구입하는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파는 이의 입장에선 무조건 비싼걸 추천할 수 있기에 가격대를 정해 “사장님이 시음해보고 괜찮았던 걸로 권해보세요” 라고 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카메라기자들은 업무의 성격상 폭탄주에 익숙하다. 그러나 독한 술은 항상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을 소외시킬 수 있다.  와인은 처음 목 넘김이 어떤 술보다 뛰어다. 그래서 여성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술도 문화이기에 폭탄주에서 와인으로 넘어가기에는 쉽지 않지만, 가끔은 회식자리에서 와인을 즐기는 기회를 가지다 보면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굳이 와인 잔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맥주잔에 마시면 된다. 그리고 소모임을 가질 때도 와인을 가져가서 먹어도 되는 단골집이라면 소주대신 와인을 마시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렇게 마시다 보면 품종에 대해서도 구별이 되고 나라별 지역별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체득이 될 것이다. 와인에 대해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도 다양하게 많이 마신 사람을 당할 수는 없다.  인간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많지만 엑스터시를 느끼기 위함도 있다. 그런 점에서 와인은 우리 인생에 부드러운 엑스터시를 가져다 주는 좋은 대상이다.   이병권 기자 /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팀 기자
    2007-07-20
  • 평양, 짜 맞추기 힘든 큐빅같은 곳
    <6.15 취재기> 평양, 짜 맞추기 힘든 큐빅같은 곳  평양 순안공항의 공기는 뜨겁게 아지랑이치고 있었다. 날씨가 그랬고, 내 가슴이 그러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찾아온 북녘 땅의 중심! 이제 누구나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는 금강산에서 느꼈던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내심, 아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닿을 수 있다는 이 땅에 두 발로 서서 유월의 평양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는 생각에 잠깐의 상념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닿았던 흥분도 잠시, 촘촘한 풀들로 덮여있는 민둥산이 내 눈 앞에 나타났고 대북 홍보자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빨갛고 자극적인 글씨들이 건물 곳곳에 흉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공항에서의 첫 느낌과는 달리 숙소로 이동하는 차장 밖으로 본 평양은 땀구멍을 자극할 정도의 강렬한 하늘이었지만 어딘지 어색했고 무언가 스산했다.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동강의 어귀 한 자락이 고즈넉한 주홍물결로 드리워질 때 쯤 취재진도 그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민족통일 대축전, 이 행사를 위해 남쪽에서 삼백 명에 가까운 각계 인사들이 북녘 땅을 밟았다. 그들의 시선과 몸짓은 제각각, 얼굴엔 여유에서 호기심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노출되었고 북녘의 공기를 리트머스마냥 빨아들이며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환영만찬, 그러나 행사의 시작부터 약간 삐걱거렸다. 연회장 주석단에 앉을 인사에 대한 견해차이가 작지만 미세한 파장을 만들었고 그 지체가 가져온 웅성임은 이번 대축전의 행보에 일정한 균열을 예고했다.  이튿날, 기우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선언문 낭독이 예정돼있던 인민문화궁전은 동원된 북측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남측 참가자들이 행사장으로 들어올 무렵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진동에 전율마저 느끼게 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갔다. 자리를 뜨는 이와 정돈되지 않은 잡음이 눈과 귀에 거슬렸다. 누군가 소리치며 불만의 소리를 내뱉고 주석단은 듬성듬성한 행사장만큼이나 고요히 비워져 있었다. 잠시 후 행사의 파행을 알리는 남측 집행부의 통고가 있었고 기다린 시간이 길었던 만큼 파장은 커져갔다. 사분오열.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견 충돌. 끝없이 떨어지는 대립의 각. 남과 북의 갈등이 아닌 남·남의 갈등으로 번져갔다. 취재진들은 날카로워진 분위기만큼이나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태의 추이를 파악해나갔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국민에게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궁전의 높다란 아치는 우리의 소리가 흘러갈 조금의 틈과 여유도 허용치 않았다. 송출할 수 있는 어떠한 여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송출 차량 제공에 대한 요구는 철저히 묵살 됐고, 파행적 행사의 취재도 북측 요원들에 의해 번번이 제지당했다. 당연히 목소리는 커져갔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행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단 말인가! 그 시각까지 주석단 인원배분의 문제는 고리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저히 봉쇄된 그 곳에서 열두시간이란 족쇄가 풀리며 서둘러 송출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무엇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모든 언론사의 주요 뉴스가 끝나고 마감이 지나버렸고, 그만큼 흘러간 시간을 기다리며 남쪽은 궁금했고 또 궁금해 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뉴스! 오늘 뉴스에 어제의 현장을 전달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방송기자단에게 평양 취재의 현주소는 더 할 나위 없이 열악하다. 송출의 갈등이 가장 큰 그것이다. 도착 첫날의 송출부터 큰소리가 오가며 잠정 중단 사태를 겪어야 했다. 송출하기  전에 먼저 보자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사전 검열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실랑이 끝에 우리의 뜻을 관철시켜 시작한 송출. 이번엔 인천공항에서 취재한 반공단체의 시위가 갓 수습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옆에 지켜보던 북측 요원이 송출을 중단시켜 버린 것이다. 영상 기사에 빨간 펜을 칠한 것이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실랑이 끝에 재발 방지 약속을 받고 부랴부랴 잔여 영상을 전송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있었던 전 통일부 장관의 연설 내용을 문제 삼아 또다시 중단으로 이어졌다. 묵과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과 북 양측대표부에 행사를 보이콧 하고 철수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늘 이런 식이다. 영상으로 만드는 기사 또한 그 자체로서 비교 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현장을 담았다고 해서 모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기자가 있는 그곳에서 취사선택을 통해 담아낸 영상은 그 자체로 기자의 가치와 영상의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전달하려는 이미지는 그만큼 더 강력한 메시지를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상 기사의 가치, 함부로 사선을 그을 수 없는 힘이 있다. 이렇게 취재 일정은 흘러갔다. 결국 마지막 날 공동선언문이 작성되고 각 대표단의 사과성 연설이 이어졌지만, 기약 없는 행사에 삼일 간 동원 되어 나온 평양 시민이나 갈등 속에 분열된 남측 참가자들의 얼굴엔 표정 없는 쓴 웃음만 가득 베어 나왔다.  방북 전 생각했던 평양과 돌아온 뒤의 평양은 사뭇 달랐다. 존중하려고 했던 그들의 말도, 조심스레 건네던 어색한 농담도 평양의 색깔에 맞게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구분 지을 수 없었던 북측의 행동이, 갈리고 찢겨진 우리의 내분이, 힘겨웠던 검열과 맞물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를 산산이 흩어놓았다. 평양, 이제 나에게는 짜 맞추기 힘든 큐빅과 같은 곳이다. 이형빈 / MBC 보도국 영상취재2팀 기자
    2007-07-19
  •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와 영상기자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와 영상기자  인문학의 위기, 사회과학의 위기라고 한다. 순수학문 즉,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들은 문과와 이공계를 막론하고 고사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학현실이다. 20-30년 전만 해도 대학의 중심에 서있던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학과들이 소수의 소위 돈 되고 출세하는 학과만을 남기고는 모두 사라질 위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과들은 살아남기 위해 학생들을 손짓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과명을 바꾸기도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대학의 현실은 이미 돈과 편리 중심으로 사고되는, 사회적 대세가 그대로 반영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것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복잡하고 귀찮고, 낡은 것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서점을 나가보면 진지한 교양서적 보다는 실용서가 판을 치고, 우리의 삶과 문화, 역사를 담은 소설 보다는 가볍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흥행에 성공해 국내시장에서의 실패가능성이 적은 번역서가 판을 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어려운 시대 수많은 사회적 현상들 중 하나라고 그냥 넘겨 버리기도 쉽지만, 이 현실이 곰곰이 따져보면 영상기자 우리자신과도 알게 모르게 큰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작년 필자는 보도영상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보도영상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표현, 기록, 소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영상매체가 등장하기까지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온 다양한 표현매체와 그것들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친 영향들을 역사적으로 이들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상매체가 발전해 오면서 걸어야 했던 질곡과 발전의 길, 그 길을 걸었던 많은 영상전문가들과 영상기자들의 삶의 문제가 글을 써갈 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역사와 사회의 발전 역사 속에서 보도영상의 문제를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고통의 글쓰기를 수행하며 느낀 점들은 이런 작업들이 사회적으로 폭넓은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과 관심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 분야의 발전이 좀 더 확고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취재현장과 방송현장에 서있는 영상기자들이 직접 담당한다는 것은 ‘몇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일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지속적으로 연구 작업을 해나가고, 체계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 작업을 체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바로 세상의 문제를 학문적 깊이로 연구해낼 수 있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가진 학자들과 수많은 동호인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런 학문적 호기심과 상상력,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세계로 발을 디뎌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위 ‘취업’이라는 경제적 현실을 통해 막아 놓아 버렸다. 부모나 사회 모두 ‘취업’과 ‘돈’이라는 물질적 주제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고, 거기에 이미 아이들은 오염되어 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을 갓 들어오는 신입생들과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간과 사회 같은 거창한 주제도 어릴 적의 순수하고 진지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영상의 역사나 영상기자, 뉴스영상 한 컷의 사회적 가치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볼 만한 독창적인 연구나 학문의 주제로 보일 리가 없다.  이런 인문사회과학이 붕괴되는 현실이 빠르게 진행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영상기자는 박제된 공룡의 모습으로 남게 될 운명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작년 보도영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놀란 점 중 하나는 외국의 경우 영상기자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그들이 보도한 영상과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기록과 연구도 언론학의 한 분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만나는 것이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이런 현실들을 정리해 <영상학>이라는 학문적 영역을 개척한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눈 돌려보면 어떨까? 40년 영상기자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언론사와 저널리즘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연구되어지는 영상기자들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걸 떠나서라도 오늘 나온 영상의 의미에 대한 사내와 사회의 올바른 비판과 비평, 평가를 받아 보는 영상기자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불편한 현실’의 문제를 떠올려 보게 된다.  인문학, 사회과학적 상상력과 고민들, 새로운 피의 수혈이 사라져 가는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우리 영상기자의 우울한 미래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옛날 어느 나라의 노인네가 하던 세상걱정과 같은 기우(杞憂)는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어나는 영상기자들의 1인 취재, 제작물들이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이런 현실들에도 눈높이를 맞추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준영 / MBC 탐사스포츠영상팀 차장
    2007-07-19
  • Re:노젓는 판사
    아! 그때 핸드폰 정말 잘 사용하였읍니다. 그때 잠시나마 문명에서 벗어난 느낌이었지요. 신발도 없이 가시밭길(?)을 30여분동안 걸어가다가 간신히 전화기를 빌렸지요. 그날 취재 후유증이 심했어요. 발바닥이 아직도 얼얼합니다.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계세요.
    2007-07-11
  • 포토라인 준칙 제정1년, 현장 적용의 현실과 문제점
    포토라인 준칙 제정 1년, 현장 적용의 현실과 문제점  2006년 8월 31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포토라인 시행준칙의 내용을 확정해 선포했다. 이것을 선포한 이유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과열된 취재현장의 질서를 조정하기에, 1994년에 한국TV카메라기자회와 사진기자회 두 단체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포토라인 운영 선언문>만으로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행 준칙도 현장적용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여를 지난 지금 이에 대한 점검과 재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시행준칙’에 대한 영상기자들의 광범위한 인식 성공  ‘포토라인 시행준칙’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고, 실시되면서, 이에 대한 영상기자들의 인식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인지는 부족하더라도 ‘시행준칙’의 제정에 대한 영상기자 개개인의 인지는 광범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취재현장에서 무질서한 경쟁체제가 있을 경우 ‘시행준칙’을 근거로 즉석에서 ‘포토라인’을 적용하고, 실행한 사례가 여러 건 있었다. 현대 정몽구 회장의 항소심공판 취재(2007.3.27), 병역특례법 위반 관련 가수 싸이의 동부지검 출두(2007.6.4) 등이 포토라인이 잘 지켜진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협회 중심의 ‘포토라인’적용은 아직 미흡  하지만, 애초의 ‘시행준칙’ 제정 시의 의도와는 달리 새로운 준칙에 따른 포토라인 제도의 실행은 각 협회가 아닌 기자실을 중심으로 이루이지고 있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출입기자단이 중심이 되어 포토라인이 잘 시행되는 것은 좋지만, 이에 대한 협회의 파악과 실상에 대한 자료축적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영상제작자들과 취재원에 대한 홍보작업 부족  그리고 ‘시행준칙’이 제정된 이후 세 협회의 홍보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 많은 취재원들이 이에 대해 인지하는 것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런 문제는 포토라인과 관련해 취재현장에서 영상기자에 대한 취재원의 취재거부 사태, 취재 방해로 인한 취재원과의 극한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를 발생시키기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취재원보호의 애초 취지를 벗어나는 결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있다.     또한, 세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영상기자나 영상제작자들의 포토라인 시행준칙에 대한 무지로 인해 포토라인이 깨지는 상황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5월 29일 있었던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영화배우 전도연의 인천공항 입국 현장에서의 난장스러운 상황이다. 협회 중심의 ‘포토라인’실시와 광범위한 홍보작업 필요  포토라인의 특성상 예고된 상황의 실시가 다수의 경우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예고된 상황의 ‘포토라인’ 설치와 운영을 협회와 상의하고 기획하고 실시하는 것이 절실하며, 이 제도가 정착하기 위한 협회의 꾸준한 실태파악 작업이 있어야 한다. 또 ‘포토라인 시행준칙’에 대한 회원과 회원이 속한 매체사들, 비회원, 취재원등에 대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홍보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정부와 방송언론 유관기관의 재정적 인적 지원 절실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한 관건은 이를 협회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실행하고 감시할 인원과 그들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다. 이를 위해 정부와 방송언론 유관기관들이 각 협회에 새로운 취재질서와 인권보호를 위한 중요한 제도로서 포토라인 제도가 정착되도록 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겠다. 영상기자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  지금까지 살펴 본 ‘포토라인 시행준칙’ 제정 1년이 갖는 의미와 현실들에서 얻는 중요한 경험은 이 제도가 시대와 역사의 산물인 만큼 그것을 잘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영상기자들이 가진 방송언론인으로서의 중요한 사명이자 임무라는 것이다. 결국, 영상기자 스스로 포토라인 시행준칙이 필요 없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도록 취재현장에서 취재원의 보호와 국민의 알권리를 절묘하게 절충시키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준영 / MBC 탐사스포츠영상팀 차장
    2007-06-26
  • <줌인> 누구나 찍는 동영상시대의 카메라기자
    누구나 찍는 동영상시대의 카메라기자  요즘 국민의 관심사를 취재하는 취재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취재현장에서 취재기자(카메라기자, 사진기자포함)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은 2000년 이후 케이블TV와 인터넷매체의 수가 늘면서부터였고, 지금은 웬만한 행사장의 참석자보다 취재진이 많아 행사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각종 매체와 취재기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메이저 방송, 신문이나 인지도가 낮은 매체나 똑같은 조건에서 취재를 하고, 각자 차별화된 영상취재를 위해 카메라의 위치를 옮기고, 다양한 앵글로 영상취재를 하고, 취재원에게 다양한 포즈와 인터뷰를 요구하기도 하면서 선의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영상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좁은 공간에서 너무도 많은 카메라기자들와 사진기자들이 취재에 임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신문사의 취재기자나 사진기자들이 기사취재와 사진촬영이 끝나면 자사웹사이트에 동영상콘텐츠 제작을 위한 동영상촬영을 추가적으로 하는 경우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차원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취재현장의 분위기와 인터뷰 등을 촬영하고 편집하여 자사사이트에서 동영상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와 동영상서비스가 되는 기사의 히트수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동영상서비스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에서 한 컷의 사진으로 승부하던 사진기자들이 더 이상 스틸사진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 된 것이다.  신문 1면 사진 1컷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촬영하던 사진기자들이 사진뿐 아니라 동영상까지 촬영하고 편집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로 역할을 요구받고 있으며, 짧은 취재시간에 본연의 임무에 추가적으로 부여된 동영상촬영을 하느라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취재기자나 사진기자들의 동영상서비스의 수준이 아직은 UCC동영상 수준이고 앞으로도 보조적인 서비스에 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카메라기자들에게 그리 크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취재환경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기자들은 본연의 업무인 영상취재를 위해 필요한 피사체와의 적절한 거리유지와 가장 중요한 한 장면에 온갖 신경을 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기 저기 불쑥 들이미는 6mm카메라의 돌출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취재현장에서의 보다 좋은 화면을 잡기 위해 카메라기자와 사진기자들이 맺었던 신사협정인 PHOTO LINE은 이런 복잡하고 무질서해진 취재현장에서는 애초에 적용되기 힘들어졌고, 각각 경쟁적으로 취재에 임하다보면 모두 함께 좋은 영상을 얻기 어려운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취재 현장일수록 피사체에 근접해서 ENG카메라와 스틸카메라, 캠코더를 들이 대다보면 취재원들이 카메라에 부딪쳐 다치기도 하고 취재현장의 분위기는 온갖 몸싸움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자신만 좋은 영상을 얻고자하는 이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취재원에 접근하다보면 모두 제대로 된 화면을 얻기 힘들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사건, 사고의 경우 취재진들과의 몸싸움으로 흔들리는 화면이 긴박감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취재현장에 맞게 PHOTO LINE과 POOL을 적절히 활용해서 모두가 최고의 영상을 얻을 수 있어야할 것이다. 보다 나은 취재를 위해 취재현장에서의 취재의 룰과 에티켓이 필요하다고 본다. TV카메라기자회, 사진기자회, 인터넷매체 등과 이러한 현장취재에 있어서의 보다 바람직한 취재를 위한 논의가 이뤄져 취재현장에서의 무질서가 없어져 취재진들도 품위를 지키며 취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취재환경에서 각 방송사별로 다양한 심층취재와 기획취재를 활발히 함으로써 카메라기자와 취재기자의 기량을 신장시킬 수 있고, 자신만의 색깔과 역량을 담은 TV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시청자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기자들의 동영상과 UCC들의 동영상과 비교될 수 없는 카메라기자들의 노하우가 녹아있는 뛰어난 영상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고품질의 TV영상으로 승부해야만 할 것이다.
    2007-06-26
  • 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얼마 전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있었다. 철마가 그토록 달리고 싶어 했던 그 길을 달린 것이다. 하늘 길, 뱃길 ,육로에 이어 마지막으로 철길이 열린 것이다. 이번 시험운행이 일회성이라는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만, 56년 만에 민족의 혈맥이 이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뉴스특보로 생방송되는 남북철도기념식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그 날의 감동을 느끼며 2000년 6월 13일로 돌아가 평양행 특별기에 오르고 있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 30분, 서울공항을 이륙 한지 10분이 채 안됐을 때 기장의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미 북한영공으로 넘어왔습니다. 2시 방향을 보십시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북녘 땅인 웅진반도의 장산곶입니다“  반세기 만에 남북의 하늘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 이제 북한이구나!”  우리는 창가에 몰려 북녘의 산하를 내려 보면서 잠시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잠시 뒤에 있을 감격적이고 놀라운 장면들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채 특별기는 순안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공항 활주로에 임시로 마련된 검색대에서 예상보다 간단하게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취재지역으로 이동했다. 취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동원된 군중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카메라 앵글을 뒤로 돌려 군중 쪽으로 줌 인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인물은 다름 아닌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실 그 당시 우리는 남북정상회담 취재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대통령 순방 취재는 출발 전에 공식 일정이 기자단에 전달돼 취재 계획을 짜고 취재팀을 나누는 게 관례인데 청와대측에서 공식적으로 기자단에 통보한 대통령의 일정이 전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조차도 공개로 해야 할지 비공개로 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북에 참여한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었다. 과연 우리가 어떤 그림을 얼마나 찍어서 서울로 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고민은 김정일 위원장의 등장으로 기우에 그치게 됐다.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잠시 감회어린 눈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다가 손을 흔들었고 김 위원장과 북한 동포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뜨거운 악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속된 말로 그림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분단 50년 만에 얼굴을 맞대고 뜨겁게 악수하는 장면을 담으면서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놀라운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김 대통령이 북한의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사열 내내 보행이 불편한 김 대통령의 보조를 맞춰가며 몇 발자국 뒤에서 걸으며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 눈길을 끌었다. 김 대통령이 적국의 의장대를 사열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다음 장면은 사열을 마치고 공항에서 떠나면서 만들어 졌다. 두 정상이 함께 같은 차에 동승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공항에서 김일성대학까지 40km에 이르는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환영인파를 가로지르며 감동으로 이어졌다. 손에 진분홍색 조화를 든 환영인파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평양시민 전체가 도로에 나온 것 같았다. 동원된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첫날 북측의 이러한 파격적인 의전은 앞으로 있을 회담의 성공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드디어 프레스센터가 있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공항에서부터 취재한 그림을 송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프를 걸어놓고 서울로 연락했다 “평양입니다. 그림 잘 들어갑니까” “잘 들어옵니다” 서울과의 직접적인 전화 통화가 금지되어 있어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지만 서울의 환호하는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1인 1실로 배정된 방으로 올라간 시간은 새벽 2시. 호텔에 들어서자 환영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혼자쓰기엔 넓었고 깨끗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평양의 야경을 보고 싶어 커튼을 열어보았다. 멀리 화력발전소의 불빛만 희미하게 비칠 뿐 거리에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은 적막의 도시 그 자체였다. 북한의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었다.  담배연기 속에 흥분과 감동의 열기를 뒤로 한 채 평양의 첫 날밤은 깊어만 갔다. 6월 14일. 아침방송을 위해 프레스센터에 내려와 보니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를 담당하는 안내원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과 출신인 홍우식이라는 30살의 청년이었다. 민화협에서 일하는 그는 나를 항상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는 그와 어제 감동적인 두 정상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고 서로 이념이나 체제에 관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신뢰가 쌓인 탓인지 이동 중에 거리스케치는 아무런 제재 없이 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튿날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차에 걸친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은 거침없고 괄괄한 말투, 호방하지만 때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회담을 이끌어나가 그동안 괴팍하고, 소심하고, 충동적인 인간형으로만 인식했던 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마라톤협상 끝에 합의문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열린 김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장에서는 남과 북의  두 정상이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것에 고무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김 위원장은 이희호 여사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기까지 와서 이산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 여사를 김 대통령 옆자리로 옮기게 하고는 “두 분이 떨어져 계셔서 김 대통령이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축배가 이어지면서 남북정상회담도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두 정상의 남북공동합의문 서명이 이어졌고 날짜를 넘겨 15일 새벽에 공식발표가 있었다.  6월 15일. 어제의 성공적인 회담결과 때문인지 아침부터 프레스센터는 술렁거렸다. 북측 안내원들 역시 합의문 기사로 전면을 가득채운 노동신문을 보면서 남과 북의 미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백화원에서 정상회담 성공을 자축하는 오찬장은 두 정상의 덕담이 오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고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김 대통령이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순안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평양시민들은 또다시 진분홍색 꽃을 흔들며 환송해 주었다. 길고도 짧았던 2박3일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순안공항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특별기가 이륙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2000년 6월. 전 세계에 시선이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남북정상회담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그 중심에서 역사의 소명을 갖고 최선을 다해 가감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영상을 취재해 베일에 싸인 김정일의 다른 모습과 50년간 상상 속에만 그려지던 북한의 모습을 전달했다. 이렇게 카메라기자의 눈으로 전달된 영상들이 세계가 한반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은 물론, 남북 간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경배 / MBC 보도국 영상취재1팀 차장
    2007-06-25
  • 900 여 일만의 복직,
    제목 없음 “형, 고마워요!”  “파업까지 치면 900일 정도 되는 기간이에요. 조합원을 100명이라고 치면 90,000일, 4인 가족으로 하면 360,000일이 걸린 셈이죠. 당시에 희망조합원은 180 명이 넘었어요.”  2004년 겨울.......  누비는 곳마다 오랜 설명이 필요했고 내쫓김을 당하면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손엔 휴대용 좌판이 걸려있어요. 영상취재 할 때와 공통점도 있었죠. 사람들은 우리를 경계 했고 우리가 그들의 가게 앞에 오는 것을 꺼려했어요. 그리고 호기심. “붉은 옷을 입은 멀쩡하게 생긴 저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형, 우리는 누구였죠?”  “우리는 iTV에서 나온 노동잡니다!” 유인물을 돌리며 우리는 쩌렁쩌렁 외쳤습니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방송회관 앞에서 그래요 우리는 노동자였습니다. 적어도 실업급여의 긴 줄 앞에 설 때 까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쫓겨난 이들과 없는 이들, 수많은 비정규직ㆍ특수ㆍ파견 노동자들과 연대를 시작했어요. 그들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오래전부터 함께 한 내 이웃이었던 거예요. 취재 온 영상 취재기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더 커졌어요. 형은 그 묘한 기분 아시죠?  그래요 형은 그 가난한 자들의 양심과 때로는 1만 5,000 발기인들 하나하나의 열망이 되어 혹은 활동가들의 신념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응원하셨어요. 하양 눈발에 빨강 점들로 박혀 그렇게 한국 사회에 불편한 질문들을 던지게 했죠. 매우 추웠고 눈도 많았어요. 하지만 서명 용지 위로 내리는 눈만큼은 뜨거웠어요. 잉크 물은 번지기 전에 닦아야 돼요.    형 덕분에 우리 희망조합은 ‘한국TV카메라기자 특별상’, ‘민주언론상’, ‘경기민주언론상’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받았습니다. 세차장에서, 정수기 회사에서, 통닭을 튀기며, 보험 상품을 설명하며, 일당이 찍힌 통장을 아내에게 내 밀거나 병원에 누워서도 우리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왔습니다. 아니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만들 자격만 주어진 셈입니다. 다시 노동자로 돌아왔을 뿐이니까요.  우리가 겪었던 이 긴 해체와 회복의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방증인가요. 새로운 회사에 여러 고민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형은 우리들의 협(俠) 앞에 의(義)자를 붙여주셨잖아요. 우리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뷰 파인더가 안으로 열리고 카메라가 조금 더 무거워진 이유에요. 형, 고마워요. 채종윤 / OBS 경인TV 영상취재팀 기자
    2007-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