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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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자 협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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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경영
  • 방송환경의 변화에 영상기자들의 변화
    방송사 입사하기 전에 방송사 취업을 준비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방송과 다른 학과를 전공했고 주위에 관련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입사준비를 하긴 쉽지 않았다. 당시 입사 시험에 참고할 자료가 부족해서 그나마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장 기자가 발로 쓴 영상저널리즘’의 책을 여러 번 읽었다. 또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에서 발간된 ‘미디어아이’ 협회보는 현장 기자들의 현안과 고민이 실린 내용이어서 당시 취업 준비생이었던 나에게 좋은 자료였다. 그래서 나는 시험 전에 3년 동안의 신문 내용을 복사해서 읽었다.   최근 급변하는 방송환경으로 변화하는 방송콘텐츠를 협회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신생종편사와 포털, SNS, OTT(넷플릭스) 등 새로운 경쟁상대가 등장하고 있다. 또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 더 강한 경쟁자도 몰려오고 있다. 각 사별로 체감하는 바는 다르고 대응도 다르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충격과 파급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하는 환경 속에서 나도 뭔가 해야지 하면서도 어쩐지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에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금년 4월27일 협회보(제106호)에 실린  SBS 심석태 뉴미디어 국장의 인터뷰 ‘영상에 스토리 붙이고 내레이션도....취재기자와의 경계 흐려질 것’ 이란 인터뷰 기사는 파급적인 방송환경의 변화를 말해 주고 있다. 뉴미디어적인 변화에 취재기자와 영상기자의 두 직종이 흐려지면서 새로운 직종이 탄생할 수도 있고 재미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줬다. 바로 비디오머그에서 보여준 SBS 영상기자의 활약은 디지털 분야에서도 영상기자의 한계가 없음을 보여줬다. SBS 활동을 벤치마크 삼아 타사도 심기일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금년 초 KBS 영상취재부에서 SNS 담당을 맡게 된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이런 고민은 항상 협회보에서 논의되어 왔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멀티기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 시절 선배들의 고민이 후배들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HD도입, NPS도입, 드론, VR등 세부적인 아이템은 계속 바뀌었지만 영상기자의 미래를 대비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협회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회사 내에서 인력도 자원도 넉넉지 않은 지금 각 회원사 별로 각개전투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변화의 물결이 몰아치는 지금, 카메라기자가 방송환경에 대처해야하는 지혜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카메라기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실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협회가 네트워크 허부로써 중심이 되어 새로운 방송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 해주기를 바란다. KBS / 고형석  
    2018-01-10
  • 일곱 번의 연기 끝에 성사된 '조용필 평양공연'
    “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 무더위가 한창이던 2004년 7월 16일 오후, 중국 상하이에 연수 중 이었던 나는 베이징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 참사의 전화였다. 그가 힘이 센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왕(歌王) 조용필을 불러 달라니, 일단 그의 정확한 지위와 제안의 진정성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조용필 당시 평양공연 남북교류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비밀주의가 횡행한다. '최고지도자의 측근이다', '권력핵심부와 바로 통하는 사람이다', '군부실세와 친하다' 등 도무지 검증할 수 없는 말들이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효력을 발휘하고, 정체불명의 브로커들이 활동한다. 이럴 경우 확인방법은 두 가지이다. 일단 그가 북한 노동당의 대남사업기관인 <통일전선부> 즉 통전부 소속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통전부 소속원은 보통 외부활동을 할 때에 <민족화해협의회> 혹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협회> 소속이라고 밝히므로, 이 두 기관 사람이면 신뢰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뻥을 치느냐 아니냐를 보고 확인한다. 북한의 기관원들은 할 수 없는 일은 애매하게 대답하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애매하게 대답한다. 모든 의사결정이 한 사람으로 집중된 북한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확언을 해 줄 수 없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언제 설화(舌禍)를 입을지 알 수 없다. 진짜 북한사람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기보다는 가능한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소극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큰 소리를 친다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 베이징과 서울에서 알려진 바로는 그가 혁명원로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최고학부인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적어도 외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몇 안 되는 북한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그의 주요사업은 무역업이었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소속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소속이 어디든, 중요한 것은 그가 조용필 공연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였다. 나는 확인된 내용을 정리해서 서울 본사로 보고했다.   팬이 있는 곳이라면 가수는 달려가야지! SBS에서는 그와 협상을 계속하라는 답이 왔다. 김 참사는 지방공연도 가능하다면서 늦어도 9월 안에는 공연이 열리도록 해보자고 적극성을 보였다.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했다. 나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 이남기 제작본부장과 조용필을 만나러 갔다. 이남기 본부장은 조용필과 직접 통하는 몇 안 되는 방송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용필의 집은 방배동 서래마을의 고급빌라 3층이었는데, 저녁 시간이었지만 집 앞에는 소녀복장을 한 아주머니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를 보자 조용필로 착각하고 달려왔다가 이내 실망하며 돌아갔다. 그들의 손에는 여러 날 접었을 종이학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인기가 이 정도인데 조용필이 굳이 고생스럽게 평양까지 가서 공연을 할 필요성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준비를 하는 스태프들의 방문이 잦기 때문인지 조용필의 거실은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작곡 작업을 위해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 두툼한 악보뭉치, 그의 오랜 손 떼가 묻은 듯한 기타, 십 수 년 간 모아 둔 트로피는 대중예술사에 기록된 그의 위상과 무게를 느끼게 했다. “조용필 씨, 평양 공연 한 번 가 봅시다.” “내가 지금까지 북한 공연을 제안 받은 것은 한 서너 번 됩니다. 어떤 때는 반 협박성 제안을 받기도 했고…. 그러나 평양 공연이 과연 가능하기나 하겠어요?” “조용필 선생님이 평양에 꽤 알려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남북한 관계의 불안정성 때문에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북한 최고위층의 재가를 받아서 추진하는 사업이 분명하므로 실현 가능성이 크다고 설득했다. 조용필은 즉답을 피하고 술잔 내려놓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짧은 정적을 이남기 본부장이 깨뜨렸다. “가수는 팬이 있는 곳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조용필은 갈등하는 듯 보였다.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미 새벽 1시 반이 넘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일단 공연제작진 구성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개성을 통한 육로방북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항공사, 해운회사와 접촉했다. 과거 계약서를 기초로 가계약서 문안도 준비했다. 공연 일자는 여유 있게 추석 때인 9월 말로 잡았지만, 시간이 빠듯할 경우에는 10월 초도 고려해 보자고 김 참사에게 통보했다. 조용필을 만난 지 사흘이 지난 날, 이남기 본부장으로부터 급하게 호출이 왔다. 조용필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조용필이 운영하는 YPC(YOUNG PIL CHO의 약자) 프로덕션의 김일태 사장도 동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양은 못 가겠습니다. 나는 가수입니다. 대중가수인 내가 정치적인 논란에 휘말리는 건 큰 부담입니다. 게다가 남북한 관계가 좋을 때라면 한 번 시도해 볼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도 최악 상황이라는데, 하필이면 내가 이럴 때 꼭 가야 됩니까?” “조용필 선생님은 이제 개인 조용필이 아니라 공인(公人) 조용필입니다. 공인은 공인으로서의 역사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있을 때, 공인인 조용필이 나서서 그 어려움을 타개할 역사적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 한가롭게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국민가수 조용필이 아닙니다.” 작곡용 노트북 자판을 가볍게 톡톡 치던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노트북을 닫더니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평양 공연 한 번 가봅시다. 그리고 이왕이면 북한의 지방 순회공연도 한 번 해봅시다.” 나는 곧바로 조용필 옆에 앉아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태 사장과 공연 일자를 상의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전국투어 ‘2004Pil&Peace’의 일정을 고려하면 예정대로 9월 20일 경이나 10월 초가 좋다고 했다. 이제 북한과의 일정 조정만 남았다.   수송 차량 36대 조용필이 결심을 한 이상 이제 장비수송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전의 다른 공연과 조용필 공연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하는 일이었다.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공연’ 때도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했지만 그때는 육로를 통해서 인원과 장비가 모두 들어갔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로 개방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다, 장비의 규모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조용필 공연 무대의 폭만 170m 정도로, 공연에 소요될 전체 장비를 모두 수송하려면 5톤 트럭 50대가 필요하였다. 이런 물량을 나르는데 필요한 배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전자장비의 경우엔 배에 싣거나 내릴 때 자칫하면 파손이 되므로 특별한 수송 방법이 요구되었다. 다음날 나는 인천과 북한의 남포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는 ‘트랜스포춘’호에 출항일정과 화물 선적을 문의했다. 화물차 50대 분량이면 컨테이너가 25개 소요되는데, 인천-남포 왕복일 경우 총비용이 1억 원 넘게 들었다. 트랜스포춘호 측은 남포항에는 선적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짐을 싣고 내릴 때 파손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주었다. 조용필 측에서는 정주영체육관의 규모를 고려하여 무대 규모를 줄이고 필수적인 장비만 가져가기로 해 5톤 트럭 26대 분량으로 줄였다. 그러나 방송사의 발전차 5대와 중계차 5대를 추가하니 수송 차량만 36대가 되었다. 공연단과 참관단을 싣고 갈 전세기 확보는 이전에도 경험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북한의 항공기는 150명 탑승에 비용이 8천만 원 정도 들었다. 남한 항공기는 300석 좌석에 비용은 6~7천만 원으로 오히려 적게 들었다. 우리는 남한 항공기를 선택했다. 항공사에서도 이런 역사적 행사에 자사 항공기를 이용하길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는 진행 상황을 정리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팩스를 넣었다.   7번의 연기 베이징의 김 참사는 여유 있게 10월 15일이나 24일로 공연을 열자고 수정 제안을 했다. 10월 17일에 청주공연이 잡혀 있던 조용필 측은 일단 판매된 티켓을 환불하고 10월 15일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다. 공연팀은 방북공연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탔다. 남한의 공연을 평양에서 선 보였을 때 과연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다. 이제 남한에서 진행되는 모든 공연은 평양공연을 위한 예행연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매일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그런데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평양 쪽에서 확답이 오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25일 이전에 답이 오지 않으면 10월 15일 공연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베이징에 전화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뿐이었다. 김 참사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9월 24일 연락이 왔다. 그러나 11월로 일정을 또 미뤄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필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사이 10월 초가 지나갔다. 여전히 평양 측에선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이러다간 11월 중순 공연도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조용필은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선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혹시 밤중에라도 연락이 올까봐 아예 전화기를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던 중 부시 미국대통령이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공연도 물 건너갔다. 다시 12월 중순으로 공연이 미루어지다가 결국 해를 넘겼다. 2005년 새해에도 남북관계는 별 진전이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남북관계에서 방송은 정치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비단 방송뿐이 아니다. 일반적인 문화교류나 경제적인 거래도 늘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 남한에서는 ‘민간교류를 늘려서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자’고 주장하지만, 북한에서는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민간교류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남한의 ‘기능주의’와 북한의 ‘구조주의’의 의견대립이다. 둘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당장 짧은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적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 사이 1월, 2월, 3월에 각각 한 번씩 만나 4월 공연에 합의를 했지만 또 무산되고 시간이 흘렀다. 봄날이 다 가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여전히 북한 측으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타 들어 갈 속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조용필은 오히려 덤덤했다. 6월 30일 드디어 민화협 측으로 부터 팩스가 날아왔다. 공연을 8월 3일과 4일에 개최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7월 초 다시 개성 봉동관에서 만났다. 이번 협의는 이전보다 속도를 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준비가 철저히 된 탓이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이번 기회를 놓치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절박감 때문이었다. 북한 측은 품위 있는 공연 무대인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열자고 제안했다. 체육관에서는 체육을 해야지 공연을 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논지였다. 개성 봉동관에서 열린 협의  우리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남한 측이 공사한 류경정주영체육관에 대해 북한 측은 보안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따라서 요인들이 공연 참관을 하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봉화예술극장의 무대 폭은 38m로, 조용필이 준비한 ‘2005Pil&Peace’ 공연 무대 170m를 수용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 측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물자의 육로수송은 양보할 수 있지만 공연 장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북한 측과 협상을 해보면, 협상장에 참석한 북한대표는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어서 회의는 일찍 끝나버렸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 서로 술잔만 기울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봉동관은 비싼 식당이다. 덕분에 북한 식당 봉동관의 매출만 잔뜩 올려주었다. 7월 16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이 금강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몽헌 회장 사후 오랜 기간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던 현대아산과 북한 측의 갈등이 봉합되는 자리였다. 현대아산은 북한 측과 백두산 관광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그 겨울의 찻집’ 등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공연을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고 한다(나중에 현정은 회장이 확인해 줬다). 베이징에서 김 참사가 ‘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라고 말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앞에서 기념촬영(오른쪽에서 필자, 조용필, 서득원 촬영감독, 윤성아 작가) 평양에서 다시 협의를 진행하자는 연락이 왔다. 7월 30일, 공연 무대 설비를 담당하는 YPC 측 스태프를 포함한 우리 쪽 인원 10명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순안 비행장 주변 넓은 들에는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이 분주히 풀을 뽑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대동강의 푸른빛이 한층 더 강렬하게 빛났다. 이 도시 한 가운데서 조용필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뭉클했다. 대동강 가운데 있는 양각도 호텔에서 양 측은 마주 앉았다. 장소 문제가 해결된 뒤라 다른 협의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연은 8월 23일 저녁 6시부터 2시간 동안 1회만 갖기로 했다. 지방공연에 대해서는 양측이 모두 부담을 가졌다. 인원은 양측 요구 안의 중간선인 163명으로 최종 확정됐다.  7번의 연기 끝에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55분 거리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연습실에서 마지막 연습에 들어갔다. 북한 측은 23곡의 노래 중 적어도 절반은 남북에 다 알려진 계몽기 가요(일제시대 대중가요)나 민요 혹은 북한노래를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조용필은 단호히 거절했다. 평양 관객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것이지 북한가요나 민요를 듣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닐 거라며, 미국가수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 때 우리관객들이 ‘그리운 금강산’을 듣고 싶어서 공연장을 찾았겠냐는 논리였다. 북한관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가로서 조용필의 고집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조용필은 북한관객을 배려해서 북한가요를 단 두 곡만을 부르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조용필은 100곡이 넘는 북한가요를 들었다. 그 가운데 인민배우 전혜영이 부른 ‘자장가’와 북한 가극의 삽입곡인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를 선택했다. 북한 측은 다시 ‘그 겨울의 찻집’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공연 곡목 안에 꼭 넣어달라고 마지막으로 요청을 해왔다. 이번 요청을 수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모든 연습과 준비가 끝났다. 8월 18일 오후 2시, 선발대 69명이 먼저 아시아나 전세기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55분 뒤인 오후 2시 55분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결코 멀지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오기현 /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 
    2018-01-10
  •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창립 30주년
    카메라기자의 권익과 영상 발전을 위해 노력한 30년   지난 11월 7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권력의 탄압과 언론자유를 수호하는데 앞장서 온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987년 11월 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TV카메라기자회 창립총회 장면   1981년 칼라 방송이 본격화되면서 TV 뉴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국적으로 TV 보급이 확산되면서 역사의 기록자인“카메라기자”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 30여 명에 불과했던 전국의 카메라기자 회원 수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대회를 치르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회원 수가 10배 가까이 증가한 300여 명에 이르렀다. 민주화 운동이 뜨거웠던 1987년, 그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7년 11월 7일, KBS와 MBC의 전국 카메라기자들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카메라기자의 권익보호와 보도영상의 발전을 위해 “한국TV카메라기자회”(현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이하 협회)를 창립했다. 한국TV카메라기자회 창립총회에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등 4당 대표와 많은 언론사 관계자가 참석했다. 초대회장에 MBC 故김익호 기자, 부회장에는 KBS 강명수 기자가 선출됐으며 회칙과 정관을 만들어 창립 취지문을 채택했다. 故 김익호 초대회장은 수락 연설에서 “KBS와 MBC 양사가 그간 현장에서 맞부딪치며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으나 이제 부터는 합심하여 질적인 향상을 꾀하자”고 말했다. 창립 당시 임원진은 회장 김익호(MBC), 부회장 강명수(KBS), 감사 송행복(KBS), 김광목(MBC), 간사에는 박충 강철원(KBS), 이병구, 정철영(MBC), 홍보위원 민상기(KBS), 이수향(MBC), 운영위원 백승대, 이우승, 김창훈, 임찬식(이상 KBS), 최종걸, 김홍기, 조항민, 양윤모(이상MBC)였다. 창립 회원은 325명으로 KBS가 145명, MBC가 지역 계열사를 포함해 180명이었다.  창립 후 첫 번째 사업으로 <뉴스현장> 회보 발행과 TV뉴스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TV뉴스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을 제정했다. 초대 집행부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서울올림픽 등 역사적인 현장에서 카메라기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협회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외신기자 초청 리셉션을 개최 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카메라기자의 역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이수향 전 MBC 국장은 현장2호(1988.12.30.발행) 기고를 통해  “자유민주주주의 정착을 위한 자율의 몸부림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에 <중략> 우리는 역사의 현장과 사회의 변화를 냉철하게 영상으로 기록하는 현장의 주역으로서 TV카메라기자의 위상 정립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제언했다. 1992년 11월 8일, SBS가 회원사로 참여하여 방송 3사가 협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1999년 6월 1일에는 청주방송(CJB)을 시작으로 인천방송(iTV), 전주방송(JTV), 대전방송(TJB) 등 지역민방이 회원사로 가입했으며, 2000년 1월 1일 YTN, MBN이 가입했다. 협회는 1998년 6월 방송직능단체 협의 기구인 한국방송인총연합회 결성에 참여하고,  1999년 방송회관 신축에 따라 현재의 한국방송회관으로 사무처를 이전했다. 소수의 카메라기자들에 의해 첫 발을 내디뎠던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전국 34개 회원사와 630여 명의 회원이 있는 협회로 발전을 했다. 협회 사업도 초창기 단순 친목단체 모임에서 벗어나 현재는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과 이달의 카메라기자상 시상을 주관하고 있다. 또 방송보도 관련 정기세미나와 지역 카메라기자 세미나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회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카메라기자협회 신문 발행이나 다양한 출판기획 사업 등 학술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회원 재교육 및 연수 등 다양한 교육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협회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나이를 먹을 만큼 영상 저널리즘의 발전과 그 맥을 함께한다. 협회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이하여 방송카메라기자의 역할과 미래의 방향에 대한 문제를 법과 제도적 측면, 더 나아가 정책적 측면에서 풀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협회는 현재 ‘영상보도윤리가이드라인’을 발간하는 작업과 카메라기자의 영상저작물에 대한 권익 보호, 초상권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창립 30주년 기념행사는 2018년 2월 22일에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시상식과 함께 개최할 예정이다.    이정남 기자
    2018-01-09
  • 국제정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舊한말 조선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강대국 틈에서 우왕좌왕하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21세기 현재에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환경에 처해 있다. 다시는 국제정세의 오판으로 인해 나라를 그르치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국제정세를 읽고 판단해야 할지에 대해 몇 가지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또는 아시아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하라.  한국 사람들은 국제정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삼국지나 손자병법 등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인간행동 양식에 근거해서 상대국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가 동북아 문제에 있어 상대해야 할 나라는 아시아적인 시각을 가진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등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나라들이다. 이들의 전략적 사고방식은 우리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나라의 전략문화를 관찰함에 있어 우리 중심의 사고체계를 기준으로 상대국의 정치행위를 분석하면 자칫 판단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대한제국 시대와 같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융합적인 시각에서 분석하라.  현대사회는 ‘융합의 시대’로 불릴 만큼 특정분야의 지식만으로는 국제정세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판단할 때 정치‧안보‧경제‧금융‧지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치는 동맹국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분석할 경우에 중동‧남미‧유라시아‧동남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추진하는지 다각적으로 관찰하고 한반도와의 연결고리를 분석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 중동지역의 화약고로 내란이 진행 중인 시리아의 경우를 보자. 시리아 사태에 관여하는 나라는 미국‧유럽연합‧중국‧러시아 등 동북아에서도 이해관계가 많은 나라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9월 유엔연설에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서로 다른 대륙에 위치한 북한‧이란‧베네수엘라 3개국을 ‘새로운 악의 축’으로 선언했다. 세 나라는 작은 나라로서 군사‧경제적으로 미국의 적수가 되지 않는 나라인데도 말이다. 실제 견제대상은 중국과 러시아이지만 이들 국가와 친밀한 주변국가인 3개국을 표적으로 삼았다. 舊소련 시절 폴란드, 체코 등 위성국을 외곽에서 공략했듯이 지금은 북한과 같은 중국과 러시아의 주변부를 약화시켜 궁극적으로 중심부를 와해시키거나 견제하는 전략이다.  셋째, 정국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면 그 나라의 적대국 언론의 보도를 참고하라.  필자는 국제정세를 파악할 때 미국 관계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견제 대상국인 중국‧러시아‧이란‧시리아‧베네수엘라 등지의 언론기사를 검색한다. 물론 이들 국가의 언론이 공정하게 보도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나라별로 비밀정보기관을 가지고 있고 사건의 정곡을 찌르는 ‘진실’을 말해주는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외국의 방송과 언론 중에는 자국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곳도 있는데 매체의 특성을 파악한 후에 기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넷째, ‘위장깃발전술’(false flag operations)은 국제정세 이해의 필수항목이다.  이 전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해놓고 남이 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군사적인 사건에 있어서 ‘위장깃발전술’에 대한 이해는 국제정세를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한 관찰법이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직후에 누군가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집단이 범죄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경우는 그 숨은 의도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실제 범인은 그 사건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이익을 얻는 자 또는 국가다. 독자들은 해외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하면 테러집단으로 유명한 알카에다 또는 IS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사례를 언론보도를 통해 자주 접했을 것이다. 두 집단은 특정국가들이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특수부대가 훈련을 시킨 그룹이다. 알카에다의 전신으로 오사마 빈 라덴이 속해 있던 무자히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지원하여 1980년대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에 대항한 테러집단이라는 사실은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의회에서 증언한 적이 있고, 지난 대선기간 중 당시 트럼프 후보는 미국이 IS를 지원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1930년대에 일본이 ‘위장깃발전술’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1년에 발생한 만주사변이었다. 일본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이미 전모가 밝혀진 것처럼 당시 관동군은 만주철도를 자신들이 폭파해 놓고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폭파했다고 주장하며 도발의 핑계거리를 찾았다. 앞으로 일본이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어 해외로 침략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어떤 유형의 ‘위장깃발전술’을 구사할 것인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다섯째, 세계 주요 언론이 동시다발적으로 장기적으로 보도하면 반드시 그 의도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세계 정치사를 되돌아볼 때 강대국은 주요 정치적 아젠다를 설정하면 언론을 통해 프로파간다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퍼먼(Walter Lippmann)이 주장한 ‘승낙의 제조'(manufacture of consent)를 통한 여론형성 작업이다. 총칼의 위협으로 국민을 겁주거나 반대의 목소리를 잠재우며 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독재국가와는 달리 민주주의 국가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여론몰이를 하고 정부정책을 정당화시킨다. 미디어를 동원하여 대중조작을 추진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일반화된 현상이다. 독일의 나치가 프로파간다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사실은 프로파간다 선진국 중 단연 으뜸은 미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국이 세계 여론을 주도하는 통신사와 언론사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승낙의 제조'가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직 교수나 전문가의 주장뿐만 아니라 유료 광고가 실리지 않는 독립 언론 그리고 정부, 관변단체, 다국적기업 등이 주는 연구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의견을 주장하는 퇴직 명예교수, 탐사전문기자 등의 의견이 유용할 때가 있다.  여섯째, 상대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을 파악하라.  특정국가의 ‘대전략’은 국가의 방향을 정한 큰 그림이다. ‘대전략’은 장기적으로 불변인 경우도 있고 도중에 수정되기도 한다. 동북아 정세를 판단할 때 1990년대 초 ‘네오콘’으로 유명한 폴 울포위츠의 주도로 작성된 ‘대전략’을 분석한 후에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대전략’은 기본적으로 현재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유효하다고 본다. 미국의 ‘대전략’은 간단히 정리하자면 “舊소련과 같은 강력한 라이벌 국가 및 지역 패권 출현 방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 유지”에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인권, 자유무역, 인도주의, 테러와의 전쟁 등 다양한 수단이나 수사법이 동원된다. 현재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핵심 견제대상은 중국과 러시아다. 이들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주변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대전략’을 염두에 두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대전략’에 따라 미국의 잠재적 정권교체 대상인 국가의 유형을 보고 북한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1)미국의 외교노선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는 정권(북한) 2)미국의 묵인 없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나라(북한) 3)독재 또는 권위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석유국유화 조치를 취하는 등 자원민족주의 노선을 걷는 정권 4)중국‧러시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미국과 적대적이며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는 국가(북한) 5)미국식 자유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나라(북한) 6)미국의 지역패권 유지에 방해되는 국가(북한) 7)미국의 적대국과 친한 국가(북한) 8)천연자원 거래 시 달러가 아닌 위안화 등 기타 화폐로 거래, 브레턴우즈체제 도전, 금본위제 채택 등 미국 중심의 금융체제에 도전하거나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간인 달러에 도전하는 국가 등이다. 현재 북한 외에 미국의 정권교체 리스트에 올라 있는 나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중국‧러시아‧이란‧카타르‧시리아‧레바논‧예멘‧베네수엘라‧쿠바‧볼리비아‧니카라과 등이다. 미국과 정권교체에 동조함으로써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서방국가의 언론이 이상과 같은 나라의 정권에 대해 보도하는 경우는 대부분 프로파간다 성격이 짙다.  일곱째, 국제적 사건의 범인이 신속히 특정되는 경우를 주목하라.  국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국제 사건의 범인 색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범인 또는 집단이 사건 직후에 특정되고 사건의 배후까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다. 최근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국가가 이란과 그 우호국인 시리아다. 이럴 경우 경제제재나 군사적 조치가 이루어진다. 특정사건은 국제사회로 하여금 경제‧군사적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된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테러사건이 발생하면 그 배후에 독재자 카다피가 자주 지목되었다. 대체로 배후국가는 이미 서방의 정권교체 대상국 리스트에 올라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상에서 국제정세를 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주의할 점이 있다면 ‘뉴스’와 ‘프로파간다’의 구별이다. 뉴스에서 99%의 ‘진실’ 속에 1%의 ‘거짓’을 포함시키는 것이 전형적인 프로파간다 기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미디어는 외국 언론기사를 비판적 수용 없이 그대로 국내에 내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미국의 프로파간다 매체인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가 내보내는 기사를 그대로 받아 보도하는 사례도 보인다. ‘뉴스’와 ‘프로파간다’를 구분하여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미디어 종사자에게 요구되는 책무가 아닐까.   장회식 뉴욕주립대학교 박사 역사학자·국제정치학자
    2018-01-09
  • 故 MBC 김경철 기자 10주기 추모글
    내 동기 경철아.   10년이 지났구나. 짧지 않은 시간인데 지금도 011-1710-1916으로 전화하면 네가 웃으며 받을 것 같다.   2007년 12월1일 새벽3시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데스크 벨소리는 늘 요란한 음악으로 지정해두어 몇 번 울리지 않아 받았다. 이 시간에 당장 회사로 오라는데 이유는 묻지 말라더라. 선배 말 어지간하면 다 들었던 것 같은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더라. 이유를 알려 달라고 물었다. 그런데 제발 묻지 말고 와달라고 하더라. 갑자기 한 주 전에 꾸었던 꿈 생각이 났다. 너를 알게 된 200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너는 내 꿈에 딱 한 번 나왔다. 그 꿈에서 너는 동일한 문장을 네 번 반복해서 말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점점 커져 마지막엔 소리를 질렀다. “힘들어 죽겠다”고. 일주일 뒤 현실의 새벽. 전화기 너머로 짧은 시간에 전해진 경직된 시공간은 이렇게 털어놨다. “경철이가 죽었어”. 회사로 차를 몰고 가는데 온몸이 부들거려 온힘을 꽉 주어 핸들을 잡아야 차가 직선으로 갈 수 있었다.   첫 비행기로 내려간 제주도. 병원 영안실엔 40여개 시신 보관 냉장고가 있었는데 너는 가장 왼쪽 아래에서 두 번째 칸에 누워있었다. 의사가 흰 천을 걷어 네 머리끝부터 쇄골 정도까지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듯 보이기도 하고, 살짝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년간 본 너의 얼굴 중 가장 하얀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작아보였고, 깨끗해 보였다. 어머님은 차마 못 들어오시고 아버님만 들어와서 확인하셨는데 “맞네, 맞아”하시곤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기억하는 네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네가 떠났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장지인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에 너를 두고 올 때까지 내 기억은 불분명하다.   경찰서와 병원을 오갔고, 부검하는 방 옆에서 숨을 죽이고 크고, 작게 울었다. 김포공항으로 들어와 삼성병원으로 갔다. 누군가 너의 사진을 모아 큰 액자를 만들어 빈소 앞에 이미 두었더라. 그 웃고 있는 파란 사진들이 이 시간이 현실임을 다시 알게 해 주었다. ‘조사낭독’을 맡게 되어 빈소 옆 응접실에서 이틀을 작성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한데 지금까지 살면서 그날 가장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기억하는 것부터 기억 해낼 수 있는 것들까지 너에 대한 모든 것을 그 날 생각해 내야 했다. 떠올릴수록 고맙고, 미안했다. 서럽게 춥던 날 병원에서 나와 여의도를 돌고나선 너의 새주소 ‘시안 거북69-1’로 떠났다.   너를 생각하면 십년이 길지 않은데, 네가 일하던 우리 일터를 생각하면 십년이 짧지만도 않네. 상상도 못한 많은 일들이 생겼다. 부서도 없어졌었고, 많은 동료들이 회사에서 쫓겨났었다. 지금도 중요한 일이 진행 중이다. 너는 네 일을 그리고 회사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네 많은 물건들에는 회사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카메라, 캠코더, 노트북, 헬리캠 조종기, 진주색 너의 스포츠카 기아 옵티마는 물론이었고, 비틀거리며 밤늦게 찾은 집 현관까지 붉은색 ‘MBC NEWS’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걷다가, 밥 먹다, 술 먹다가도 네 생각나지만 회사에서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꼭 생각이 난다. 그렇게 아끼던 네 일터에서 너는 어떤 결정을 했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네 의견을 묻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도 나 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10년간 여러 차례의 파업 끝에 지금은 많은 것들이 순리대로 매듭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너도 거기서 열심히 응원했지?   유달리 사람과 어울리고 즐기는 시간을 좋아했던 녀석이라 너 보낸 뒤 후배들 들어오면 데리고 인사시켜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태 한 번도 못 데려갔네. 그래봐야 너 떠난 지난 10년간 들어온 후배가 4명이니 언제든 승용차 한 대로 모두 태워 갈 수 있다. 곧 보자. 용현선배 후배로 왔다고 너무 장난치지 말고 옆에서 잘 지켜드려. 레쯔비 캔커피 하루 5개는 많으니 2개정도로 제한해서 드리고. 스타크래프트는 치트키에 익숙하시니 감안해서 1:1대결은 살살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미안하다.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      
    2018-01-09
  •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광주시의회와 '한츠페터상 제정 논의'
    광주시의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제안에 검토 입장    지난 12월 7일 한원상 회장이 광주시의회를 방문해서 이은방 의장과 면담을 가지고 '위르겐 힌츠페터 상' 제정 방안을 논의했다. 왼쪽부터 한원상 회장, 이은방 의장, 김영범 부국장(MBC), 서재덕 부장(KBS광주)/ 사진=광주시의회 제공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한원상 회장은 지난 7일 광주광역시의회를 방문해서 이은방 의장과 면담을 가지고 ‘5·18광주민주항쟁’을 알린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뜻을 기리는 ‘위르겐 힌츠페터상’ 제정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한 회장은 “‘5·18광주민주항쟁’의 토대가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하고 “자유⋅민주⋅평화를 위해 노력하여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의장은 힌츠페터 상 제정과 관련해서 “이는 시민이 의회에 제출한 일종의 청원(공공의 제도 또는 시설 운영에 관한 의견 제시)이라고 간주해 의회 차원에서 심도 있게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문상필 광주광역시의원도 한 회장을 만나 “‘위르겐 힌츠페터상’은 ‘5·18광주민주항쟁’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의미가 있다”며 “시의회에서 조례를 만들 것이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위르겐 힌츠페터상’ 제정을 위해 지난 9월 14일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의 면담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 면담을 가졌다.   ‘위르겐 힌츠페터상’은 TV영상뉴스를 취재한 전 세계 카메라기자를 대상으로 경쟁부문 임팩트상(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인도주의적 영상), 뉴스상(시의성에 초점), 특집상(우수 탐사보도 영상), 비경쟁부문 공로상(자유·평화·인권·민주화에 기여한 카메라 기자 또는 희생자)을 나눠 수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2018-01-09
  • 더불어 사는‘살기 좋은 공간’  - 스마트 시티 <上>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궁극적인 생존의 문제와도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무엇을 바꿀 것인가? 현재 무엇이 필요한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 2050년 세계인구가 98억 명으로 증가하게 된다면, 도시는 더욱 커지고, 많아지며,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면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체계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술표준이 만들어질 때까지 수많은 기기가 만들어지고, 사라졌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크기가 조정되고, 더 아름다워지며, 똑똑해진다. 이렇게 변화된 도시를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 부르고 있다. 영국 런던 2050년 가상의 도시 풍경. The crystal.   그러면 앞으로 펼쳐지게 될 스마트 시티는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들 마음에 이미 그려져 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도구가 도구로서 인식되지 않아야 그것을 도구로 선택한다.”는 명제를 인용한다면, 효율적인 공간 활용과 예술성,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이 접목된 도구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동안 친숙했던 신체의 연장으로써 거부감 없이 몸에 착착 감기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상상 속의 미래도시 런던의 모습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사람의 인식이 그만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의 유명한 건축가와 도시계획자들은 새로운 기획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 신체, 그리고 공간의 문제를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이 사랑하는 가우디(Antoni Gaudí)도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에 있는 가우디 건축물   기술발전과 공간변화 그러면 기술이 발전하면 자연히 행복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2014년 네덜란드의 노르트홀란트주가 자전거 도로 일부에 70m 태양광 패널이 들어간 길을 만들었다. 평평하게 도로 위에 설치됐기 때문에 이동에는 불편이 없지만, 패널 위가 오염될 경우, 발전효율은 떨어진다. 이와 함께 한국과 미국에서도 기존의 직사각형이던 태양광 패널을 전통모양 기왓장 형태로 디자인한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구축해 선보였다. 아직 기존의 기와를 모방한 형태에 지나지 않지만, 기존 기와보다 강도는 더 좋아졌다. 기존의 태양광 발전이 설치를 주저하게 했던 이유로 지붕 위에 패널을 새로 올려야 하고,  방수설비를 다시 해야 하는 점, 중복투자와 디자인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점, 투자 대비 효율이 높지 않은 점, 낮은 내구성 등을 모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이런 친환경 기술이 직접 우리 삶을 체감할 만큼 스마트 하게 바꾸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가우디 벤치 의자. 인체공학적 설계로 편안하면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살기 좋은 공간’이란 그럼 구체적인 살기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 2017년 5월 현재, 재외국민 유권자는 29만4,633명이 있다. 그들이 가진 삶의 목표는 더 나은 삶을 찾는 여정이며 세계로 뻗어가는 진취적 도전정신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행복한 삶을 찾았을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1980년 디자인 계열 대학생으로 유학 온 뒤 정착한 50대 후반의 A 씨와 네덜란드인 남편을 따라 2년 전에 정착한 B 씨,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주재원으로 있다가 결혼 후 정착한 C 씨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본다. A 씨와 B 씨가 사는 암스테르담은 100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 아직도 구매자에게 매력적인 주거지역 중 하나인 도시이다. 난방이 잘 안 돼서 겨울에는 냉기가 방안을 떠나지 않고, 높은 유지비용과 수리비 부담이 높은 주거환경을 가졌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자부심이 높은 도시이다. 한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쏠라 로드를 지나가고 있다. 또, 도심에선 자동차를 운행하기엔 좁고, 굽은 불편한 도로를 갖고 있다. 더구나 주차장 용지는 마련하기 힘들고, 간혹 나오는 것은 비싼 비용을 지급해야만 가까운 곳에 주차할 수 있는 그런 도시이다. 한국에 비교해 비싼 대중교통비에 환승 시스템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자주 있지 않아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궂은 날씨에는 대부분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그냥 맞고 가는 그런 삶에 적응하는 것이 이방인에게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잠시 세워둔 자전거는 어느새 누군가 타고 가버린다. 거리에선 낯선 이가 소매치기 대상으로 나를 노리고 있지는 않은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항시 유지되는 그런 도시다. 하지만, 그 외의 무엇이 그들을 거기에 머물게 한 것인가? 그 답이 살기 좋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저, 네덜란드는 소득 수준에 따라 최저 36.55%~최고 52%까지 세금을 내고 있다. 최저임금은 21세 이상 1,551.60유로이고, 앞으로 18세 이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그리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과 한국 근로자 대부분이 겪고 있다는 과로로 인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그리고 총리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이런 소소한 차이가 모여서 그들의 경쟁력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태양광 에너지를 수집하는 패널. 10m 당, 3600KWh 전기에너지를 생산 그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적 소득의 분배를 이야기한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A. 사이먼은 2000년 한 강연에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중국, 인도, 또는 제3국에서 같은 고된 노동을 한다고 가정하고서, 벌 것으로 기대하는 소득을 비교해보라고 한다. 그 수치가 10대 1이든 100대 1 이상이겠지만, 관대하게 본다면 5분의 1만큼 ‘번(earned)’ 것의 나머지는 엄청난 생산적 사회 시스템과 연관된 세습재산으로 광대한 물적 자본뿐 아니라 심지어 지식, 기술 그리고 조직적 노하우를 포괄하는 많은 양의 지적 자산을 축적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습재산’과 ‘지적 자산’이라는 말로 잘 포장되어 알아보기 쉽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분배’ 이며, “미국이라는 사회 시스템 속에 있다는 일종의 행운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4차 산업혁명과 공공소득’에서 김종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기 좋은 공간은 누구나 일한 만큼 공정한 분배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며, 이웃의 어려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의 책임과 의무로 받아들이며, 스스로 그 책무를 다하려는 공동의 믿음이 존재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김종완 / YTN 후원 : 언론진흥재단    
    2018-01-09
  •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트로피, 작가에게 들어본다<1>본상 트로피
    본상 트로피 휴먼을 상징한다. 형상이 의미하듯 조리개를 넓게 혹은 좁게.....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삶의 가치를 보다 넓고 깊게 추구함을 테마로한 트로피이다. 박진환 / 장인미술 작가 ⋅현 장인미술 작가 ⋅춘천 에디오피아 6.25 참전 기념비 동상 부분 조각 ⋅선림원 범종 복원 ⋅대구 시민의 종 조각 ⋅경북대종 설계 조각 ⋅충북 새천년대종 설계 조각 ⋅마산 3.15기념관 천장 조형물 조각 ⋅예촌갤러리 초정 전시회 ⋅포스코갤러리 초청 전시회 ⋅ART & CRAFT. INC U.S.A 전작가 ⋅BEIJING FLOWERS ARTISAN ART 전작가
    2018-01-09
  •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트로피, 작가에게 들어본다<2>굿 뉴스 메이커상, 특별상, 공로...
    굿 뉴스 메이커상, 특별상, 공로상 트로피 큐브는 한 개의 꼭짓점에 3개의 면이 만나고, 모두 6개의 정사각형 면으로 이루어진 3차원 정다면체다. 그것은 완벽한 기호를 지향하여 인간이 만든 구조적인 세계를 조형적으로 압축해 낸다. 그러한 세계는 아스키코드 등으로 형성된 디지털 부호와 레고블록 등으로 형성된 아날로그 물성 등을 알레고리 한다. 추상과 구상이 만나고 인간과 자연이 교류하는 지점에서, 정육면체는 그 강직함과 올바름을 경계선 위에 부유시킨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트로피 제작을 제안 받았을 때 가장 먼저든 생각은 ‘신뢰’였다. 신속하고 정확하고 빠른 것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담보되지 못하거나 보장받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긴다. 서 있는 입장, 바라보는 관점이 상이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번뜩 들었던 생각은 정육면체였다. 정육면체는 전술했듯 흩어진 꼭짓점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고, 그렇게 모인 원점은 입방의 정다면체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또 주어진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힘을 더 쓰거나 덜 쓴다면 완벽한 큐브를 완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교한 힘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평소 함축된 세상을 제법 정확하고 정교하게 기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영상기자의 이미지는, 그 어떤 형상보다 정육면체를 닮았다고 ‘번뜩’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 개의 정육면체로 이루어진 상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 쪽 정육면체는 유리재질, 하단은 나무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는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구축한 세미오시스(semiosis)를 크리스털 재질로 상징시켜 표현했고, 나무는 자연의 감성과 그것이 만들어낸 피시스(physis)를 호두나무 재질로 상징시켜 표현했다. 그렇게 제작한 이유는 태생적으로 ‘손 밖의 도구’일 수밖에 없는 카메라를 ‘손 안의 도구’로 ‘체현’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재질을 하나의 틀 속에 이중회기 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디지털과 아날로그 따위의 이질감을 손아귀 내에 호혜적으로 묶기 위해서였다. 호혜적으로 묶인 손 안의 도구는 카메라 기자의 정직과 신뢰 그리고 정확한 기록행위를 통해 세상에 전달된다. 일찍이 라이프의 존 도미니스와 ARD의 힌츠 페터 기자 등이 그렇게 했으며 우리나라의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이 그렇게 해 왔다. 세상의 진실을 한정된 렌즈 속에 가감 없이 기록하려는 노력은 손 밖의 도구가 손 안의 도구로 체현되는 과정이고 실천인 것이다.   트로피 제작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갭은 컸다. 스케치와 제작도 때때로 불일치했다. 난감했다. 난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등장했던 한원상 협회 회장님의 격려와 채근은 큰 힘이 되어줬다. 그렇게 몇 달하고도 달포가 지나 지금과 같은 트로피를 볼 때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것을 느낀다. ‘완성도에 한 발 더 들어가 봤으면… 톤과 매너를 맞추고 룩과 필을 더 해봤으면…’ 하지만 이 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보다 많은 영상기자들의 자부심을 대신하고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기자들이 만든 ‘의식적 에네르게이아’는 작가가 집착하는 ‘외형의 완성도’를 손쉽게 넘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작가의 몫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이 상을 수상할 ‘정직한 큐브를 완성하는 영상기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서정호/미디어 아티스트 연세대학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 독일 레드닷 디자인상 수상 독일 디자인상 수상 관훈언론상(저널리즘혁신부문) 등 다수 수상 
    201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