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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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길태 사건 취재기
    “길태다.”   2010년 3월 10일 15:00경 부산 사상구 덕포시장 인근에서 김길태가 붙잡힌다. 경찰이 이양실종사건의 용의자로 김길태를 지목하고 공개수사로 전환한지 8일, 이양의 시신이 발견된지 4일만이다. 김씨의 흔적을 찾아 사상구를 헤매던 기자들이 급히 사상경찰서로 모인다. 이송되는 김씨를 생방송하기 위한 중계차와 분노에 찬 시민들까지 들어선 경찰서는 북새통을 이룬다. 검거현장에서 경찰서까지는 불과 500m정도. 혹시 기자들을 따돌리려 다른 곳으로 갔을까? 온갖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40분쯤 지나자 정적을 깨고 김씨를 태운 차가 사상경찰서로 들어온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김씨가 차에서 내리자 분노한 시민은 그를 향해 욕설과 주먹을 휘두르고, 과열된 취재경쟁에 포토라인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분노한 시민과 통제력을 상실한 경찰 그리고 흥분한 기자들... 밀치고 넘어지고 소리 지르는 경찰서 주차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무질서의 현장에서 김씨는 “전 모르는데요, 그냥 라면만 끓여먹었는데요.”라는 말을 남긴 채 조사실로 끌려 들어갔다. 김길태처럼 생각하라   김길태의 모든 것이 이슈화 되었다. ‘김씨가 주로 자장면을 먹는다’는 기사가 나가자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김길태 자장면’이라는 검색어까지 등장했다. 경찰의 브리핑이나 김씨의 모습, 사상경찰서 스케치는 촬영 후 실시간으로 방송국에 전송되었다. 수많은 방송사의 카메라기자들은 김씨의 행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찰서에서 낮밤을 보냈다. 타사 선배들 뿐 만 아니라 우리 부서 최고참이신 50대 강상윤 부장님은 김씨가 조사실에서 나오는 단 10초를 촬영하기 위해 반대편 건물 창문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 사람이면 반드시 한번쯤은 화장실을 갈 것이기 때문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김씨를 잡았다. 범행현장에서는 김씨의 족적을 따라 움직였다. 경찰 못지않은 탐문취재였다. ‘내가 김씨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김씨의 이동경로를 따라 카메라를 들고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김씨의 흔적은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김씨가 범행 전 술을 마셨다는 사당에서는 깨진 술병조각이 취재대상이 되었고, 김씨가 시신을 유기하는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를 찾기 위해 현장 근처의 집집마다 벨을 눌러 확인하기도 했다. 현장검증이 이루어진 날, 경찰은 시민들이 몰려 검증의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로 취재를 거부했지만 근접촬영은 풀 취재단이 맡고, 폴리스라인 외부는 자유롭게 취재한다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현장검증은 10시였지만 취재진과 구경나온 시민들은 보다 일찍 나와 김씨를 기다렸다. 나 역시 김씨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서 카메라를 세웠다. 혹시 돌출행동을 하는 시민을 촬영하기 위해 신경을 썼지만 시민들은 “모자를 벗겨라”며 얼굴공개만 요구할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도시, 재개발 예정지.   김길태 사건이 발생한 곳은 재개발 예정지역이다. 김씨는 이양을 유괴한 뒤 재개발 예정지 내 한 빈집에서 성폭행 뒤 살해했고, 여러 빈집을 옮겨 다니며 경찰의 수사망을 피했다. 이양의 시신 발견 후 취재를 위해 찾은 현장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도시였다. 한낮이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수많은 폐가는 조명을 사용해야만 촬영할 수 있었고, ‘범죄하기 좋은 곳’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습하고 어두웠다. 범행현장과 시신이 발견된 곳은 직선거리로 불과 50M이내였지만 길을 따라 움직이면 몇 배 더 긴 거리였다. 특히 미로 같은 골목은 낮에는 물론 밤이 되면 더욱 길 찾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2명의 여중생을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리고 아이템을 위해 그 학생들을 불특정으로 촬영하며 분향소에서 처음 만났던 이양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재개발 예정지는 부산에서만 200여 곳에 이른다. 경제논리에 의해 생겨난 재개발 예정지가 더 이상 아이들의 희생지역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역시 카메라기자들의 몫이리라. 이제 방송은 얼굴을 원한다.   김길태 사건은 이른바 조두순 사건으로 아동ㆍ청소년성범죄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특히 아동ㆍ청소년성범죄와 같이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얼굴공개에 대한 논란이 그 어느 때 보다 뜨거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은 김길태의 얼굴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김씨가 차에서 내릴 때 나의 머리는 인권침해와 알권리의 경계를 넘나들었지만, 몸과 카메라는 김씨의 얼굴을 아무런 여과 없이 게더링(gathering)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카메라기자의 판단은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방송은 좀 더 클로즈업된 김씨의 표정을 원했고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영상은 편집을 통해 하루에도 수차례씩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흉악범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고민했던 문제였지만 그동안의 논의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만 남았다. 앞으로 제2, 제3의 김길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2010년 4월 15일,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는 피의자 얼굴 등 공개에 관한 조항이 신설되었다.(제8조의2) 흉악범 얼굴공개에 대한 논란 역시 계속 될 것이지만, 한번 공개된 이상 앞으로의 보도 영상은 더욱 그들의 얼굴을 원할 것 같다. 하지만 초상권 공개는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이제 보도 영상에 있어서도 현장에서의 카메라 기자의 판단을 넘어 협회를 중심으로 법적 기준에 상응하는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야 한다. 사건은 진행형이다   법원에서는 아직 김길태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졌다. 3월이 지난 이후 수많은 사건들을 접하며, 나 역시 김씨를 잊었지만 후기를 쓰며 다시 한 번 그때를 떠올렸다. 사건 이후 아동ㆍ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정책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또 재개발 예정지에 대한 계획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울러 인권과 초상권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할 방송의 기준은 마련되었는가? 남은 건 김길태의 얼굴뿐이다. 마지막으로 이양의 명복을 빈다. 권태일/ KBS 부산총국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4
  • 백령도 그 침묵의 바다 앞에서
    그 침묵의 바다 앞에서 천안함이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뉴스를 모니터 하다가 귀에서 맴도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백령도 수심 20m 부근에 침몰하였다"라는 기자의 목소리... 이 소리가 나를 움직이게했다. 수심20m면 스쿠버다이빙으로 얼마든지 내려갈 수 있는 깊이다. 그래서 수중팀이었던 나는 수중팀원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가야 할듯 싶다"고 말했고 그 후배 역시 "가시죠" 쉽게 대답해주어서 백령도로 출발 하게 되었다. 수중카메라를 챙기고 또 HD ENG 까지 챙겨 백령도로 향해 일요일 아침 여객선에 짐을 실었다. 수중촬영장비와 스킨스쿠버 장비까지 화물 도선비 까지 추가로 지불 하면서 도착한 백령도 바다는 천안함 승조원들의 목숨을 그리도 많이 빼앗아 갈만큼 수중팀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보도와는 달리 함수와 함미가 서로 6Km 이상 떨어져 있고 또 대부분의 승조원이 있을꺼라 예상되어지는 함미 부분은 수심 40m내외로 스킨스쿠버로 접근하기는 깊은 수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백령도에 도착한 첫날 부터 한국구조단의 활동을 취재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도 바로 깊은 수심과 사리 현상으로 정조 시간이 매우 짧아 수중 수색작업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천안함 백령도 침몰 사고를 통해 국민들은 물론 현지 취재팀이 침몰 현장의 현장취재를 하기위해서 가장 많이 언급 되었던 사리와 조금 그리고 정조 시간의 이해가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리와 조금은 15일 간격으로 이루어지며 사리 때는 정조 즉 물의 흐름이 가장적은 시간이 짧기 때문에 수중촬영 또는 수중작업 시간은 아주 짧아지게 된다. 반대로 조금 때에 가까울  수록 정조 시간은 길어지기 때문에 수중촬영 시간 또한 길어지게 된다. 사리와 조금은 달을 보고 쉽게 알 수 있는데 보름달에 가까우면 사리 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는 서해안뿐만 아니라 남해, 동해, 제주도일대..모두 이와 같은 사리와 조금 그리고 정조 시간을 체크하면서 수중촬영을 한다. 특히 서해는 수심이 얕아서 동해 남해보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기 때문에 수심을 이용한 다이빙이 자주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 사리때는 얕은 수심을 이용한 수중촬영을 할 수있지만 반대로 정조시간이 짧아 물이 흐르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수중촬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또 심한 조류에 위험할 수 있다. 조금 때는 정조시간이 길어 바닷물의 흐름이 적어 수심은 깊지만 상대적으로 바닷속에 있는 뻘들이 조류에 떠다니지 않고 바닥에 가라 앉아 사리때 보다는 시야가 훨씬 좋아진다. 수중촬영하기에도 또 안전한 다이빙을 위해서는 조금때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좋다. 물론 뉴스환경이 사리와 조금을 따져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그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동해안과 제주도역시 사리와 조금 그리고 정조 시간 또 해류까지도 염두 해서 수중촬영을 해야 하는데. 바다가 깊어서 밀물과 썰물 때문에 강한 조류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해안의 경우 섬과 섬 사이에서 강한 조류가 발생하는 것 역시 서해와 같이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내는 위험한 취재환경이다. 이병주 / SBS 영상취재팀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4
  • ‘사랑한다. 아들아.’ 이 말을 듣고도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뉴스뿐만 아니라 여러 프로그램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런 이 말을 나는 현장에서 직접 듣고 있었다. 미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 한마저 느껴지는 가족의 목소리였다. 취재를 하고 있으면 모두들 의식하지 못한 체 눈물짓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촬영기자선배, 취재기자 모두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했다. 이런 상황에 이팩트와 상황을 담으려는 나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래도 나는 촬영기자였다. 조금이라도 더 그 모습을 모두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이번 일에 고생한 선후배님들 수고하셨단 말씀을 드리고.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11시 30분. 처음 대전에 도착했을 때 현충원은 평택과 다르게 매우 고요했다. 사람들의 발길은 보이지 않았고 주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만 선선하게 내 몸을 스치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침착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취재차량과 기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주변을 정리하던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도 점차 들려왔다. 2시. 현충문 앞으로 방송을 위한 모든 셋팅이 완료되었다. 주변으로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들었고 방송차량과 통제차량들이 여기 저기 얽혀있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지막 길을 떠나는 아들을 가슴에 묻으려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 시간, 그 곳에서 아픔을 나누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촬영기자로 현장에 선 역할이 나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작년 수습을 지내고 큰 현장의 중심에 선다는 부담은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려 했고 그런 나는 상황과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3시 10분.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며 시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유가족의 차량이 현충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을 따라온 방송차량을 시작으로 운구차량 그리고 유가족의 차량이 여러 대 그 뒤를 따랐다. 술렁이는 분위기와 취재진들의 발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발도 현장을 담고자 이리저리 움직였다. 드디어 차량에서 영정사진이 내려오고 사람들의 눈도, 나의 눈도 촉촉이 젖어갔다. 예정되었던 식이 시작하고 마지막 자리를 지키주려는 가족들의 힘없는 모습도 모두 나의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왔다. 가족들이 헌화를 하며 통곡하고 나의 카메라도 떨렸다. 나는 당시 행사장 안에 pool단으로 들어와 있었다. 큰 현장에서 처음으로 하는 pool단으로 긴장은 매우 컸다. 그러나 주변에 뛰는 선배들을 보며 나 역시 올바른 행동을 하기위해 노력했다. 나는 촬영기자다. 그 순간만큼은 선배도 후배도, 무엇도 아닌 촬영기자였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진정시키고 한 발짝 뒤에서 냉철히 볼 수 있어야 하는 촬영기자였다. 5시. 이제 마지막 가는 길 하관식이다. 짧은 시간 안에 송출을 마치고 뒤늦게 이동한 그곳에서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가는 내내 내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먼 곳까지 들려오는 가족들의 통곡은 도착하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서 보였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팠다. 왠지 가족들을 대하는 내 카메라가 미안하기까지 했다. 영현이 내려오고 가족의 얼굴을 볼 땐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나는 촬영기자다.’ 나는 촬영기자다. 앞으로 수 십 번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자리를 지켜야 할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계속 힘겹게 카메라를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촬영기자인 이상 이러한 아픔과 힘듦은 숙명이다. 항상 웃고 있는 나의 선배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작은 자리에서, 술자리에서 가볍게 하는 선배의 말 한마디는 한마디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새삼 느낀다. 선배들의 가슴도 나처럼 미어졌을 것이란 것을... 민창호 / KBS 영상취재국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4
  • 혼돈의 시간과 정지된 시각
    혼돈의 시간과 정지된 시각 -해군 제 2함대 취재기-   부산 여중생 살인 사건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 남짓. 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평택이었다. 언론사에 입사해 뉴스를 만든 지 이제 5개월 남짓밖에 안된 수습기자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천안함 침몰 사건은 내게 시작부터 혹독한 시련을 줬다.   평택 해군 제2함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햇볕 따뜻한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이라 고속도로는 더욱더 막혔고, 1분이라도 빨리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내 마음은 그만큼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하고 넘어가기에는 얼마나 많은 자괴감이 따르는가. 평택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이 자괴감을 다스리느라 꾀나 애를 먹은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현장에는 이보다 더 큰 자괴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조금만 더 통화했더라면…….”   길고 지루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평택 해군 제2함대 정문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이 보였고, 그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었다. 한쪽은 자식과 남편의 생사가 궁금해 안절부절 못하는 실종자 가족들. 다른 한쪽은, 이들을 누구보다 먼저 취재해 속보경쟁에서 이기려하는 취재진들, 나 역시 차에서 내리자마자 후자집단에 속하게 됐다.   함대 민원·행정 안내실 안에 있는 가족들은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 특히 눈가 주위가 심하게 부은 몇몇 분들을 보며, 밤새 얼마나 오열했는지가 감히 눈앞에 그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는지 주변 누군가를 의지한 채 겨우 텔레비전만을 응시하는 실종자의 아내, 그리고 그분을 다독이는 작은 손, 고개를 숙인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계신 실종자의 아버지, 애꿎은 담배만 계속 태우는 실종자의 숙부, 보는 내가 이렇게 가슴 아픈데, 당사자들을 얼마나 찢어지겠는가.   한참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슬픔을 느껴보려는 와중에 누군가 내 손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의 아들은 아픈 동기를 대신해 천안함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며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시는데,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잘 될 거라며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그분은 한참을 땅에 앉아 통곡하시다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카메라를 들고, 기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현장에서 돌아다니지만, 막상 그들에게 내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남편, 아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가 결국 나에게는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무력감은 부끄러움으로 승화되어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가슴은 찢어져도 내 가슴은 찢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잘 찍는 수밖에…….”   생각이 마저 정리되기 전에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군의 성의 없는 대처에 화가 난 실종자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2함대 정문 게이트가 무너지고 가족들은 여세를 몰아 부대 안 강당 쪽으로 뛰어갔다. 놀란 기자들은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고, 더 놀란 군인들은 황급히 추가 병력을 불러와 가족들과 취재진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단으로 들어왔어도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에게,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다 생사도 모르게 돼 버린 실종자의 가족들에게, 총을 조준하는 군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울분이 터졌고, 나도 모르게 총을 겨누는 헌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 뒤에서 팔과 몸을 잡았고, 자연스레 총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되었다. 비참했다. 두렵고 무섭다기보다는, 기자라는 신분을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을 나라의 주적처럼 대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다행히 실종자 가족들과 취재진들이 공보장교를 몰아세워 인명피해 없이 상황은 정리됐지만 이런 참기 어려운 상황은 천안함 함장을 만나며 극에 달했다.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함장의 철면피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공보장교가 옆에서 시키는 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상황에 함장은 최선을 다했다.”라는 공허한 대답을 되풀이하는 함장을 보며, 자기 할 말만 해버린 채 줄행랑치는 함장을 보며, 이건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 생각이 내 자괴감을 깨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 절규하는 가족들의 모습들 하나하나를 내 뷰파인더에 담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어찌 보면 카메라기자로서 자격 미달일 수도 있지만, 거침없이 REC 버튼을 누르는 타사 선배들과 달리 REC 버튼에 엄지손가락만 갖다 댄 채 망설인 순간도 있었다. 그들이 왜 애절하게 아파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내가 이들을 왜 잘 찍어야 되는지 깨달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목숨을, 국가에 믿고 맡겼다가 뒤통수 맞은 가족들을 가슴으로 공감했고, 이런 그들의 슬픈 사정은 반드시 카메라를 통해야만 세상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호 / mbn 영상취재부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4
  • MBC 김재철 사장 퇴진 촉구 파업 한 달
    MBC 김재철 사장 퇴진 촉구 파업 한 달 파업 36일째 MBC노조가 파업에 돌입한지 한 달이 지났다. 1992년 최창봉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52일간의 파업 이후 두 번째로 긴 MBC 파업 기록이다. MBC 파업의 단초는 김재철 사장이 황희만씨를 보도 본부장직에서 파한다는 약속을 지키는 듯 보이다가 지난 4월초 천안함 사태가 발발한 시점에 부사장에 임명한 것에 있다. 또한, 김재철 사장이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의 폭탄 발언에 대해 고소고발이 지지부진한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이 두 가지 사안은 김재철 사장이  MBC노조와 더 나아가 국민과 약속한 사항이다. MBC노조는 약속을 어기고 국민을 우롱하는 김재철 사장의 행태에 분개해 지난 4월 5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MBC 본사 1층 민주의 터에서 파업 출정식을 열고, 본격적인 파업에 들어갔다. MBC노조는 총파업 특보에서 “김재철의 기습적인 황희만 부사장 임명으로 청와대의 MBC 직할 통치를 위한 김재철-황희만-전영배의 삼각편대가 완성됐을 뿐 아니라, 김재철이 김우룡에 대한 고소를 포기함으로써 ‘말 잘 듣는 정권의 청소부’임을 자인한 만큼 총파업을 통한 전면적인 퇴진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파업의 결의를 밝혔다. 이에 따라 MBC노조는 “정권의 용병이자 희대의 사기꾼인 김재철을 MBC에서 몰아내고, 김우룡과 뉴라이트에 의한 방문진 접수-엄기영 축출-김재철 투입-‘조인트 폭행’을 통한 MBC내 좌빨 척결-MBC 직할 통치 체제 완성으로 이어지는 이명박 정권의 MBC 장악 과정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될 때까지 총력 투쟁을 벌여 나가겠다”고 결의 했다.     파업이 진행되고 있던 4월말 김재철 사장은 노조 집행부 13명을 민형사상 고소고발하고,손해배상청구를 하기에 이른다. 또한, 19개 지역 MBC도 지역 노조에 고소 방침을 밝혔다. 본사는 지역 MBC에 손해배상 소송·징계까지 할 것을 촉구해, 전방위적인 노조 압박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역 MBC 사장협의회는 "불법 집단행동이 계속된다면 회사는 법과 사규를 엄중하게 적용해 원칙대로 처리할 수 밖에 없다. 형사 고소를 위해 지역사 권역별로 법률적 검토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철 사장의 노조에 대한 고소에 맞서 MBC노조 이근행 위원장은 단식투쟁으로 그 의지를 보였다. 또한 이에 동조하여 4월 29일부터는 입사 14년차에서 20년차에 이르는 24명이 자발적으로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차장급 사원들이 집단적으로 동조 단식을 벌인 것은 MBC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여기에 96년 입사한 40여명의 사원들도 자발적으로 김재철 사장 출근 저지와 동조 단식에 나섰다. MBC보도영상협의회 소속 카메라기자들과 편집기자, MBC기자회의 기자들은 ‘보도국 선배’이기도 한 김재철 사장과 황희만 부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김재철 사장과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5월 3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그리고, 같은 날 MBC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기명(記名) 성명서를 ‘김재철, 황희만 선배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내 “후배로서 간곡하게 부탁드리오니 물러나 주십시오”라고 김재철 사장과 황희만 부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김재철 사장이 사외에 마련한 집무실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며, 사퇴를 거부할 경우 불신임 투표도 추진키로 했다. MBC노조의 파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자가 늘어난 이전 파업과 다르게 참여자 수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파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가 더해진다는 것을 증명 했다. 파업 첫날 507명이던 파업 참여 인원은 김 사장이 출근을 시도한 4월 20일 658명으로 증가했다. 이후엔 21일 645명, 22일 650여명, 23일 630여명 수준을 나타냈다. 파업 투쟁의 방법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거리 선전전이나 자전거 선전전등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한걸음 다가가 MBC파업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한편, 인터넷상(www.saveourmbc.com)에서도 '파업 뉴스데스크'와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여 MBC 파업을 응원하는 정치권 및 언론, 시민단체, 시민들의 목소리 등을 소개하고 있다. MBC 파업의 여파는 시민사회까지 번져 나갔다. 김재철 사장이 MBC노조 집행부를 고소한 시점에서 MBC경영진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어 졌다.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는 지난 4월 28일 MBC 총파업 투쟁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MBC에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집행부를 징계하는 시점에 맞춰 연대파업 투쟁을 포함한 총력 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또, “김재철 퇴진, 국회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는 전 조합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파업 성금 모금 운동을 조직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누리꾼들의 모임인 ‘진실을 알리는 시민’은 시청률 하락을 내세운 노조 압박을 막기 위해 재방송 시청운동을 펼치고 있고, 언론개혁시민연대 및 민주언론시민연합은 각각 ‘엠비시 지키기 반짝 뽐내기 대회’(파업 지지 창작물 공모)와 문화방송 노조 지지방문을 진행했다. 또한, 각계의 지지성금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파업 뉴스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후원금 송금 하겠습니다”, “반찬값 아낀 걸로 후원금 조금 더 보냈습니다”, 회사 안팎에서 현 정권의 방송 장악에 맞서 공영방송을 지켜내려는 MBC 노조의 파업을 응원하며, 시민들이, 단체들이, 심지어 해외에서도 1만원, 2만원, 3만원 모은 성금이 1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전 국민이 응원 한다 MBC를 지켜내자", "국민이 스폰서가 되겠다" 위의 문구는 지난달 30일 노조의 파업 26일째인 노동절 전야. 서울 여의도 MBC에서 3천여 명이 촛불과 함께 든 피켓들의 구호이다. 노조·시민사회 단체·민주화 인사들·일반 시민들까지 각계각층 인사들이 모여 "공영방송 MBC를 지켜내자"고 함성을 질렀다. 민주노총,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무원노조,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대학노조, 공공운수연맹, 서비스연맹, 사무금융연맹, 여성연맹, 화학섬유연맹 등이 참석해 MBC 노조에 대한 연대의 뜻을 전했다. 김영훈 민노총 위원장은“내일 노동절을 기점으로 이명박 정부의 조인트를 까는데 앞장서겠다"며 "MBC를 지키겠다"고 밝혔다. 정용건 사무금융연맹 위원장도 "국민이 스폰서가 되겠다"며 MBC 노조에 신용카드를 투쟁기금으로 전달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 등 시민사회계 인사들도 참석해 노조의 투쟁에 힘을 실었다. 백기완 소장은 참석자들에게 "여러분의 파업은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를 심판할 뿐 아니라 청산하는 것"이라며 "단결을 해야 한다.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MBC지키기 시민행동'이 주최한 'MBC 지키기 반짝 뽐내기 대회'에서 수상한 시민들이 MBC에 대한 애정을 공개하기도 했다. '똑똑이 엄마'는 "제가 20대 초반 당시에도 PD수첩이 미운 털 박혀서 없어진다고 했다"며 "이번에도 'PD수첩 없애겠다, 무한도전도 없애겠다'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저희 가족 모두 (MBC 노조를 응원하는)글을 쓰고 피켓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MBC지키기 시민행동'은 MBC 파업을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메시지 등을 시, 에세이, 칼럼 및 비평, 편지, 사진, 그림, 만화 및 만평, UCC, 플래시, 동영상 등에 담아 인터넷 상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이날 촛불문화제에서 5일째 단식 투쟁 중이었던 이근행 MBC노조 위원장은 “MBC가 최후의 보루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목소리를 잊지 않아서 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MBC 파업은 김재철 사장 및 황희만 부사장의 퇴진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을 고소하라고 파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MBC 투쟁은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상식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밤에 여기 와주신 국민들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투쟁 의지를 밝혔다. 편집위원 공동 취재
    2010-05-13
  • <릴레이 인터뷰> YTN 진민호 차장
    YTN 진민호 차장님 인터뷰 1. 심상근 부장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셨는지요? 원주 KBS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별명이 ‘욕쟁이 선배’ 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생각하지만 우리 후배들에게는 그렇게 친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겉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마음이 여리신분입니다. YTN으로 이직할 때도 아쉬움에 눈물까지 보이시던 분이었습니다. 원주에 업무차 여러 번 가지만 못 뵙고 와서 아쉽습니다. 조만간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2. 카메라기자의 길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 원주 KBS에서 일할 때는 편집을 담당했었습다. 그리고 1995년에 YTN이 개국하여 초창기 멤버로 카메라기자 일을 시작했습니다. 카메라기자로서는 YTN에서 처음 업무를 시작했지만 편집을 했던 경험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3. 카메라기자로서 언제 보람을 느끼는가? 기억에 남는 일은? 보람이라고 말할 것은 크게 없습니다. 다만 레코딩 버튼을 누를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곧 카메라기자로서의 보람 아니겠어요? 기억에 남는 일은 96년에 동해안으로 침입했던 무장공비 사건입니다. 한 3달을 사건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추석을 현장에서 보냈는데, 무장공비들도 고향에 있었더라면 가족들과 추석을 지냈을 텐데 모두 자살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이념이라는 것이 뭔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카메라기자들은 대부분 사건,사고 등 어두운 내용을 다룹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세상이 밝아져서 좋은 일만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4. 춘천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었나? 10년 조금 넘었습니다. 원래 고향이 원주인데 춘천에 온지 오래되니 여기가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춘천은 아름답고 살기 좋습니다. 계절마다 멋진 풍광이 멋지고, 교통도 좋고, 무엇보다 도시가 복잡하지 않아 편리합니다. 언제고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맛있는 막국수와 닭갈비가 있고 가이드겸 술동무겸 함께 해 드리겠습니다~^^ 5. 쉬는 날에는 주로 무엇을 하시는가? 운동을 좋아합니다. 주로 산행을 다니는데 암벽등반도 하고 겨울에는 빙벽등반도 합니다. 지금 춘천 클라이머스라는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회원이 15~20명 정도인데 매우 활성화 되어 있어 매주 즐겁게 산행을 즐기고 있습니다. 춘천 드름산에 산행 길을 춘클릿지길을 만들었는데 인기가 좋아 주말이면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암벽등반은 벽과 나의 싸움입니다. 힘이 들긴 하지만, 집중력도 높여주고 체력보강에 단연 최고죠. 평일에는 시간이 나면 해동검도를 합니다. 카메라기자에게는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체력은 무형의 전투력입니다. 몸이 여의치 않으면 좋은 영상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6. 앞으로의 계획? 지금까지 뉴스만 다뤘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한번 제작 해보고 싶습니다. 산을 좋아해서 생태다큐를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 책도 보고 있고 나름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4계절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으며 자연을 느끼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퇴직을 하게 되면 지리산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업무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지만 방송계를 떠나게 되도 개인적으로 꼭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고 싶습니다. 7. 후배들에게 한 말씀? 각 방송사마다 모두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 선배들의 사건 현장에서의 경험담을 귀담아 듣길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매뉴얼입니다. 그리고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카메라기자들은 좋은 영상을 찍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물론 좋은 영상이 필요하지만, 욕심을 부리게 되면 항상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특히 화재현장과 같은 곳에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안전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기자에게는 건강관리가 필수입니다. 체력이 안 되면 게을러지고 욕구가 안 생깁니다. 자기관리에 힘을 쏟길 바랍니다.   10. 다음 릴레이 추천. GTB 강원민방의 권순환 팀장을 추천합니다. 같은 춘천에 있는데도 업무 때문에 만나기가 힘듭니다. 특히 권순환 팀장은 정감 가는 기자입니다. 늘 후배들을 먼저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권순환 팀장! 다음 인터뷰때 시간 비워두십시오. 오랜만에 같이 만나 술 한잔 하죠~       대담 : 정대건 / 제5기 명예카메라기자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3
  • 천안함 침몰, 백령도 취재기 -YTN 김현미
    백령도 천안함 취재기 YTN 영상취재1부 김현미 천안함 함미 인양을 앞두고 추가 인원이 백령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건이 터진 후 줄곧 가고 싶었던 현장에 드디어 나도 들어가게 된 것이다. 선배들은 무조건 옷을 두껍게 입으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도 얼마나 추울까 했는데 ‘정말 추웠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백령도. 겨울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무릎담요까지 덮었건만 차디 찬 바닷바람은 그 모든 것을 뚫고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함미와 가장 가까운 취재 포인트였던 용트림 전망대는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작은 바위가 있다.) 특히 바람이 심한 지역이었다. 흡사 낚시꾼을 연상시키듯 모든 카메라 기자들이 그곳에 일렬로 앉아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보니 정말 낚시꾼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바다 위로 떠오른 함미, 그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언제 발견 될지 알 수 없는 실종 장병들. 맨 눈으론 절대 볼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망원렌즈에 디지털 줌까지 사용해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는 뷰파인더로만 살펴봐야했다.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낚시꾼의 심정이 될 수밖에. 해무로 가려진 백령도 앞바다, 그리고 그 바다 아래 잠긴 천안함. 망원에 의지해서 밖에 볼 수 없는 현장에 해무라도 끼면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가까운 화면을 주시하고 있다 보면 저절로 멀미가 났다. 그나마도 보이면 다행, 아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무가 심한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이곳이 바다가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랬다면 이런 사고도 없었을 것이고, 천안함 침몰의 비밀도 빨리 알아낼 수 있었을텐데.) 추위와 뻗치기가 주는 지루함에 온 몸이 뻐근해 질 무렵 먹었던 따끈한 오뎅 국물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백령도의 푸른 앞바다와 용트림 전망대를 주름잡던 세 마리의 개도 우리의 지루함을 달래주곤 했다. 이젠, 함수다. 어느 덧 함미가 평택 2함대로 떠나고 그간 관심 받지 못했던 (실종 장병의 대부분이 함미 부분에 있을 것으로 예상됐었기 때문에) 함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함수가 가장 잘 보이는취재 포인트는 해병대 유격장 바로 옆 절벽이었다. 백령도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이 절벽도 군사지역이었다. 처음엔 나가달라던 군도 가장 좋은 포인트를 사수하려는 카메라기자들의 취재 열의 앞에선 두 손을 들었다. 함수 인양 작업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보도 내용이 바뀔 정도로 변수가 많았다. 진척이 있다가도 와이어연결이 실패하거나, 쇠사슬이 끊어지거나, 기상 악화로 작업선들이 대청도로 피항 하는 일들이 변덕스럽게 일어났다. 아무래도 인양작업이 길어질 것 같아 교대 인원이 들어오기로 결정된 날, 갑자기 내일 당장 인양이 가능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함수는 못보고 떠나나 했는데 떠나기 전날 함수가 수면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연돌 인양작업을 지켜보러 연화리 포구에 있다가 함수의 절단면이 들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함수가 평택 2함대로 향하던 날 나도 백령도를 떠나왔다. 천안함 함미와 함수 부분 절단면에 숨겨져 있을 침몰의 비밀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춥고 황량했던 백령도 앞 바다는 천안함이 그 안으로 스러진 후 아직까지도  조용하다. 천안함 인양과정 취재를 통해 하나의 실마리라도 밝혀보려 노력했던 취재진의 노고도 백령도 앞바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작업을 결국 보지 못하고 떠나서 일까. 사건 현장에 가장 가까이 가서도 결국 아무런 실마리도 밝혀내지 못하고 떠나서 일까. 멀어지는 백령도와 함수를 보고 있으니 시원함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백령도에도 개나리며 진달래며 봄꽃이 폈다. 그렇게 천안함 희생 장병 가족들에게도 봄이 찾아오길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2010-05-09
  • 쇄빙선 아라온호의 한계와 희망
    쇄빙선 아라온호의 한계와 희망 신동환/ SBS 영상취재팀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눈 덮인 활화산인 멜버른 산과 희고 긴 얼음 협곡, 대륙의 산맥들,  빙하가 지나간 거대한 자리,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타국의 기지들. 남극 대륙에서의 취재 마지막 날 헬기를 타고 돌아본 테라노바 베이의 모습이다. 평생 다시보기 힘든 그 풍경들이 아직 눈앞에 선하다. 대한민국의 첫 쇄빙선 아라온 호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남극으로의 첫 항해를 했다. 세종기지 이후의 두 번째 남극기지 (실제 남극 대륙기지로는 첫 번째) 건설 후보지 선정과 배의 쇄빙능력 테스트가 그것이다.  극지 취재이다 보니 평소 출장과는 다르게 준비해야 할 품목들이 있었다. 일단 저온에서 취재를 해야 했기에 카메라를 한기로부터 보호할 방한 용품들과 핫 팩 등의 물품이 필요했고 다양한 영상을 위해서 망원렌즈, 와이드렌즈 등을 추가로 준비했다. 게다가 남극 대륙에 상륙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과 각종 개인 장비들도 필요했다. 취재 복장도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대륙에서의 취재 가능한 일정과 정확한 기상상황을 알 수 없었고, 현지는 여름이라지만 날씨가 급변한다는 정보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배는 인천을 미리 출발했고 우리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리틀턴 항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물품들을 구입한 후 2-3일 간의 취재를 마치고 아라온 호에 승선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영화 ‘Eight Below'에 나오는 것처럼 남극으로 가는 관문의 하나이다. 1월 12일 출항한 배는 1월 22일 위도 70도 근처에서 러시아 쇄빙선 아카데믹 페도로프호를 만날 때까지 쉼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아라온 호는 길이 120미터 정도의 6000천 톤 급 배라지만 큰 바다의 너울에는 상당히 흔들렸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 모두 심했다. 멀미로 무척 고생하리라 예상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임시로 만든 기자실 안에서 큰 짐들은 모두 끈으로 연결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책상과 테이블의 바닥에는 마찰력을 키우기 위해 투명 플라스틱을 깔았다. 가장 중요한 카메라가 안전하도록 항상 신경을 써야했다. 그럼에도 물건들이 수시로 떨어지고 굴러다녔다. 음료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가 내용물이 모두 순식간에 쏟아져 애를 먹은 기억도 있다. 2층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배의 흔들림 때문에 떨어질 뻔한 경험도 했다. 배가 흔들릴 때는 항상 깊은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잠에서 깰 수 있어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화(?)를 면했다. 방의 문을 여닫을 때에도 주의가 필요했다. 배가 흔들리는 순간에 큰 힘을 받은 문이 갑자기 닫힐 경우 손이나 발이 문에 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돌방을 사용한 사람들은 배가 흔들릴 때 짐과 함께 방을 가로질러 굴러다닌 경험을 했다. 러시아 쇄빙선을 만날 즈음에는 이미 주변이 얼음으로 가득 찬 바다였기에 배는 더 이상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들이 파도와 너울들을 막아준 덕분이었다. 아라온 호는 아직 스스로 쇄빙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첫 대륙 목표지인 케이프 벅스(Cape Burks)에 도착할 때까지는 러시아 쇄빙선 아카데믹 페도로프의 안내를 받아 뒤따라 가기로 했다. 양 측 배에서 인력 교환도 이뤄졌다.   러시아 쇄빙선에 대한 필요한 취재가 끝나고부터는 남극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과 생물상에 관한 취재를 했다. 배가 얼음 사이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영상에 담기 위해 헬기를 탔고, 배의 갑판에서도 바다를 가득 채운 얼음들과 그 풍경을 영상 취재했다. 점차 펭귄들과 바다표범들이 얼음 위에 한 마리씩 나타남에 따라 그 모습들을 담기 위해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장착하고 배의 난간 앞에서 이른바 ‘뻗치기’를 했다. 움직이고 있는 배 위에서 망원렌즈로 취재를 하는 일은 침착함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뻗치기를 하는 동안 배 위로 눈보라가 치고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남극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들을 카메라에 그리고 내 눈에 확실히 담았다. 낯설지만 아름다웠다.   위도 70도 근처에서부터는 해가 지지 않았다. 배는 위도 선을 따라 횡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아 그때마다 날짜와 시간을 바꿀 수가 없기에 처음에 사용하던 뉴질랜드 시간을 계속 사용했다. 어차피 항상 밝은 날이었기에 사용에 무리는 없었다. 다만 밤이 없는 날들은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우리들의 생체리듬과 생활패턴을 엉망으로 만들어줬다. 잠을 자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어려웠다. 어두운 밤이 그리웠다. 러시아 쇄빙선은 남아공에서 출발했고 그 곳의 시간을 사용했기에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우리 배와 밤과 낮이 달랐다.   1월 24일 마침내 남극대륙 첫 목적지 케이프 벅스에 상륙했다. 연구진은 그곳에서 며칠 머물면서 조사 및 연구활동을 할 계획이었지만 취재진에게는 하루의 상륙만이 허가되었다. 헬기를 타고 순차적으로 대륙에 내렸다. 하루의 기간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과 장비를 충분히 챙겼다. 여름이라 그런지 케이프 벅스 곳곳은 메마른 암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기지를 건설하기 좋은 장소 주위를 돌며 각자 맡은 조사를 벌였다. 근처에 있는 러시아의 루스까야기지에 임시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원거리에 있는 포스트에는 뒤늦게 이글루를 설치했다. 러시아기지와 인근의 담수호, 조사현장들을 취재하기 위해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내내 걸었다. 날씨가 나쁘지 않았음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꽤 좋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변했다. 기온이 급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와 현지 베이스캠프에서 취재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느 정도 취재를 마치고 아쉽지만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장소인 테라노바 베이를 기대하며 헬기를 이용해 배에 복귀했다. 연구진들의 대륙에서의 생활에 대한 취재는 아쉬웠지만 남위 74도에 위치한 남극 대륙을 직접 밟아 봤음에 의미를 뒀다. 우리 취재진이 직접 대륙에 올라 그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연구원들이 케이프 벅스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며칠 동안 배는 쇄빙테스트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가장 큰 문제는 테스트에 맞는 얼음을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계절이 여름이다 보니 작은 얼음들은 모두 녹아버렸고 남아 있는 얼음들은 너무 두껍거나 다른 면에서 적합하지 못했다. 대륙기지 선정을 위한 조사단의 일정과 맞추다보니 쇄빙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계절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합한 얼음을 찾기 위해 러시아에서 데려온 얼음 전문가들이 투입됐다. 며칠의 탐사 끝에 얼음을 찾았지만 두 번의 테스트는 실패하고 세 번째 테스트를 통과했다.   케이프 벅스에서의 조사단들이 모두 배로 복귀하고 두 번째 목적지인 테라노바 베이로 향했다. 큰 얼음덩이들 때문에 항해시간은 당초보다 길어졌다. 2월 6일 테라노바 베이 앞바다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 날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날씨가 좋지 않아 일정이 하루 연기됐다. 기상이 계속 안 좋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다음날인 2월 8일 오전에 상황이 좋아져 상륙하기로 했다. 테라노바 베이는 케이프 벅스 보다 조금은 더 남극다운 풍광을 보여줬다. 커다란 빙하가 대륙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고 너른 공간이 있었고 멀리 활화산도 보였다. 산들 뒤 쪽으로는 거대한 협곡도 자리하고 있었다. 케이프 벅스에서와는 달리 테라노바 베이에는 망원렌즈를 갖고 상륙했다. 기본적인 연구모습과 자연풍광을 취재한 후 망원렌즈를 이용해 대륙에 인접해 있는 얼음덩어리 위에 모여 있는 바다표범들을 취재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한참을 걸었다. 눈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걷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처음 발자국을 내주는 남극 대륙의 눈 위로 걷는 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무사히 바다표범 취재를 마치고 조사활동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다른 조사활동을 취재하려 준비 중이었는데 뒤쪽에 있던 산 위로 눈보라가 넘어오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산 위쪽에 바람이 좀 세게 분다고 생각했던 것이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역시 철수가 결정되고 헬기를 이용해 배로 복귀했다. 배에 오르고 한참이 지나자 곧 대륙 쪽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급변하는 남극의 날씨였다. 위험 요소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날까지 기상이 좋지 않아 대륙기지 조사단원들도 접근을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밝긴 하지만 밤이 되고서야 연구진들이 다시 대륙에 상륙해 못 다한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마지막으로 헬기취재를 마치고 대륙에서의 일정을 끝냈다. 2월 10일 해가 지지 않는 남극 대륙을 뒤로 하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항으로 향했다.   배에서의 송출은 인터넷을 이용했다. 속도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위도 60도 정도까지는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좋은 화질로 충분한 양의 그림을 보내기는 힘들었지만 현지에서의 소식을 전할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위도가 높아질수록 인터넷은 불안정해지더니 70도 근처에서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이후에는 배의 선교에 있던 위성전화를 이용한 이메일에 첨부파일 형식으로 그림을 보내야 했다. 당연히 용량은 아주 작아질 수밖에 없어서 그림의 질과 양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메일 사용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언론사들과 공유해야했기에 시간이 부족했고 선교에서 이런 일련의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호의적이었던 선장도 설득해야했다.   이번 남극 행은 대륙에서의 충분하지 못했던 취재 등에 아쉬움이 남지만, 내가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그 어떤 출장보다 많이 기억에 남는 출장이 될 것 같다. 단지 눈으로 봤던 모습들만 해도 그러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아라온 호가 생긴 이상 남극 대륙에 가게 될 취재진이 점점 더 많아지겠지만 역시 처음이라는 단어는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기엔 충분하다. 이번에 얻은 귀중한 경험이 나뿐만아니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훌륭한 자양분이 되리라 확신한다. ※ <미디어아이> 제71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 http://www.tvnews.or.kr/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0
    2010-04-16
  • 장례식에 카메라 플래쉬?
    생각해보신적 많을 겁니다. 장례식 취재때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번쩍번쩍하는 눈부심과 타타타타탁 1초에 15프레임을 찍어내는 eng 녹화를 능가하는 촬영 소음. 흠. 이건 아니다, 아닌데, 고인들, 유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언론인이기 이전에 인간대 인간으로서 이건 아닌데. 하물며, 카메라기자들도 더이상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멀리서 포토라인 지켜가며 촬영하고 있는데, 그것이 다 언론인으로서의 절도를 지키자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협회가 다른 이유로, 다른 언론직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눈부심과 그 소음을 감내하며 그냥 그 현장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냥 두어야 할지. 협회차원에서 최소한 장례식장에서만이라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해야 옳을지, 인간적으로 아니지않냐고 해야할지, 촬영할 때 방해된다고 솔직히 얘기해야할지... 어찌해야하나요? 어찌합니까? 이젠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에게 카메라 들이대기 겁나는 한 촬영기자입니다.
    201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