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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해방의 거리 ‘우리의 뉴스’를 기록하는 ‘영상기자’가 등장하다

관리자 2026-09-01 조회수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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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은 우리민족이 빛을 되찾는 기쁨으로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 ‘光復’의 날이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945년 8월 16일은 한국의 영상기자들에게는 꼭 기억해야 할 날이다. 우리땅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영상기자들이 등장해, 전국팔도에 고을과 거리의 한국민들에게, 해방의 기쁨이 쏘아 올린 빛을 카메라에 담아, ‘뉴스영상’라는 우리의 기록, 우리의 현대적인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처음으로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일본제국주의는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천황이 이를 인정하는 라디오발표를 했지만, 이 소식은 당일 조선 민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전날부터 일본정부의 항복을 감지하고 안전한 퇴각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일제의 항복 이후를 논의하는 비밀협상을 진행했고, 8월 15일 조선의 모든 식민통치기관과 공공기관에 소속된 일본인들에게 해당 기관에서 철수할 것을 명했다.

1920년대부터 우리만의 영화제작을 위해 노력하던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은 영화제작사와 신문사의 뉴스영화반을 만들어 조선만의 영화산업과 스타일, 제작토양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노력은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전국적 흥행은 물론, 일본에서 개봉되는 대성공을

거두며 민족영화의 등장이라는 성과를 가져왔고, 그 여세를 몰아 1930년대 조선의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들이 일본에서도 흥행하는 성과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대동아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식민지 조선도 전시동원체제로 급속히 편입시키려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의 영화산업과 영화인들을 전시동원체제 강화를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과 일꾼으로 강제편입 시키기 위해 ‘조선영화령’을 발동했다. 이에 의해, 우리영화의 토대를 쌓아가던 영화제작사들은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일제의 국영영화기관으로 통폐합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까지 조선의 영화인들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소속되어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선전하고, 조선민들의 참전과 전시생산체제로의 동원을 부추기는 프로파간다 영화제작에 참여하며,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연명하거나, 이를 거부하고 영화제작의 현장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졌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공무원들의 조선 내 해당기관 철수가 명해지자 ‘조선영화제작회사’의 대표와 관리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들은 소속된 영화인들에게 조선해방의 사실과 자신들의 철수사실을 알리고 현장을 다급히 떠났다. 

누구보다도 조선의 해방을 열망해왔고, 우리 시선의 우리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영화제작을 염원했던 조선영화제작회사 소속 영화인들은 그날 저녁 긴급 회의를 열고, ‘민족해방이라는 역사적 대사건과 해방의 감격을 조선의 영화인으로서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우리 영화인들은 긴급하게 ‘뉴스영화반’을 조직해 조선팔도 전국 각 지에서 벌어질 민족해방에 대한 조선민들의 환희와 새나라 건설을 향한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이들은 굳게 잠겨줘 있던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창고문을 따고, 보관되어 있던 8대의 카메라와 필름을 꺼내 전국 각 지에서 벌어지는 해방의 상황을 기록할 <조선영화건설본부>를 결성하고 산하에 뉴스취재팀을 편성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서울 곳곳에서 이뤄진 민족해방을 맞이한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해방된 우리의 산하에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우리의 모습과 이야기를 기록하는 우리의 영상기자가 등장한 ‘역사적 그날’이 시작된 것이다.

 

‘뉴스대’라고 불린 뉴스취재팀은 최고참인 이명우를 필두로 김학성 등 5명의 촬영감독들이 영상기자가 되어 카메라를 들고 해방된 조선의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1945년 8월16일 정오 무렵 휘문고에서 열린 건국준비위원회 집회, 여기서 광복을 알리는 여운형의 대중연설, 오후 4시경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을 비롯한 수감자들이 석방되고 이들과 가족, 거리의 군중들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장면, 이후 이들이 서울역까지 행진하고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 합류하는 민초들의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항복조인식을 하는 장면, 미군과 소련군이 우리땅에 진주하는 장면, 일제치하 35년간 좌절하지 않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지사들의 귀국장면 등 광복의 순간 순간, 우리 민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현장에서 한 장면 한 장면을 영상에 담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기록한 해방의 순간들은 그해 9월 24일 미군정의 정식허가를 받아 <해방뉴스>라는 제호로 전국 방방곡곡 해방의 소식과 기쁨을 알리는 최초의 뉴스영화로 보급, 상영되어 해방된 조선의 백성들과 만나게 되었다. 

 

 1885년 세상에 등장한 영상기술과 그 생산물인 영상을 활용해, 자주적인 사회적 기록을 하고, 그 산물인 영상물을 사회구성원들이 활발하게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의 역량을 가졌느냐의 여부에 따라, 어떤 국가와 사회는 공통의 인식과 이해에 바탕한 여론을 빠르게 형성하고,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고, 그 역량이 미비하거나 작동하지 못한 사회와 국가는 주권을 침해당하거나 식민국가로 전락하는 고통을 겪었던 결과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비로소 우리의 시선과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뉴스로 제작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땅의 사람들이 함께 ‘오늘’을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날. 영상기자와 뉴스영상이 등장한 날, 바로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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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뉴스>의 존재는 2005년 일본에 존재하던 판본을 한국영상자료원이 입수해 복원 후 공개하면서, 역사문헌과 증언의 기록에서 실제하는 현실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지난 8월13일 KBS 다큐인사이트 <되찾은 시간>편에서 당시 뉴스영상을 복원한 다큐를 통해, 한국사회 최초로 영상기자가 등장한 날, 그들이 촬영한 해방의 순간들을 방송했다. 

 

*참고자료: 

1)나준영, 《한국 영상저널리즘의 변화에 관한 연구: 1970년대와 80년대의 MBC 영상저널리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사논문, 2010, p.8~18.

2)YTN, 『일제시대 우리말영화 첫 공개』, 2005.3.1. 방송 뉴스리포트

3)KBS, <다큐 인사이트- 되찾은 시간 - 8.15의 기록> 26.08.13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4AX9erOM29o)


                                                                                                                    MBC 나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