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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야 할 우리들의 숙제 ‘풀(POOL)’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너트 조이는 노동자’

  "테이블 오른쪽에서 스케치해주시고요! 저는 가운데서 싱크 딸게요. 아! 그리고 그쪽은 밖에서 교육감 들어오는 거 맡아 주시고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굳이 이곳에서까지 취재 풀(POOL)이 필요한 건가?'
  지난 1월 20일, 곽노현 교육감이 석방된 뒤 처음으로 갖는 회의에서였다. 회의장은 3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카메라기자가 이동해가며 취재하기에 큰 불편함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조중동’ 종편과 ‘뉴스Y’는 풀을 구성해 취재했다. 세밀하게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촬영해 나갔다. 모두발언의 어디가 중요한 건지, 누구의 표정을 어느 순간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정신없이 취재하던 내 눈에 다시 그들이 비쳤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서 제품에 너트를 조이는 일을 부지런히 반복하는 노동자처럼 보였다.
  취재를 마치고 선배와 이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회사마다 그림이 똑같으면 우리(취재 기자)는 'ㅇㅇㅇ뉴스 누굽니다' 이것만 바꾸면 되겠네."라며 선배는 냉소를 보였다.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답은 금세 나왔다. '기존의 카메라기자들이 하던 걸 보고 그대로 따라하려던 건 아닐까?'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잘못된 POOL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풀의 남용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해묵은 과제다. ‘조중동 종편’의 풀 남용도 기존 카메라기자들의 관행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장에서 2개사만 취재하고 나머지 방송사는 촬영한 회사로부터 그림을 받는다든지, 물 먹은 그림을 쉽게 받아 나눠 가진다든지, 풀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장에서 굳이 풀을 한다든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이런 풀이 잘못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도 방송뉴스에는 많은 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가운데는 경쟁하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취재하려고 맺은 풀 영상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다.
  천편일률적인 보도 영상이 대한민국 방송뉴스를 메운다면 시청자들의 볼 권리는 침해된다. 같은 기사라도 카메라가 비출 수 있는 부분은 무궁무진하고 그 안에서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차별화된 뉴스 콘텐츠 제작에 사활을 건 카메라기자들이 똑같은 영상으로 어떻게 뉴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단 말인가. 방송뉴스에서 영상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우리가 풀에 관대하다면 이건 모순이다.

카메라기자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풀을 지양함으로써 카메라기자의 경쟁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풀을 통해 모든 방송사에서 같은 영상이 나온다면 개인의 역량은 드러나지 않는다. 역량이 노출되지 않으면 경쟁은 불가능하고, 경쟁이 사라지면 발전도 없다.
  노동의 분업은 작업의 효율성을 증대시킬지는 몰라도 필연적으로 노동 소외를 불러온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작업 과정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기사를 쓰는 카메라기자의 취재과정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자신만의 일관된 흐름을 통해 취재를 시작해 마무리한다. 이 과정을 통해 뷰파인더 속 프레임엔 비로소 한 기자의 정체성이 녹아든다. 무분별한 풀 취재로 일관성 없는 컷을 짜깁기한 기사에 카메라기자의 정체성과 미장센 등이 담겨 있을 리 만무하다. 순간의 편리함을 좆다 스스로를 취재 과정에서 소외시키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종편채널의 출범으로 매번 취재현장은 카메라기자들로 넘쳐난다. 포토라인은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고, 취재 1시간 전에 현장에 도착해도 자리를 못 잡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우리가 카메라기자로 일하는 이상, 일터 환경을 스스로 변화시켜 나가는 작업은 필수다. 그들의 취재 방식을 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인다면 그들 스스로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새로운 기자들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제대로 풀을 사용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한다.

배완호 MBN 영상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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