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화재 취재기 Ⅱ>
그들이 정당한 보상을 바라는 이유
새벽 5시 30분. 차에 타고 나서야 취재를 시작한다. 조간을 뒤지고 6시 라디오 뉴스의 볼륨을 높이고. 사망자 수를 확인한다. ‘30여명이라.’ 머릿속으로 현장을 그린다. 창고, 비상구, 용접, 유가족들… 아침 먹기는 글렀다는 생각부터 든다. 살겠다고… 휴게소에 들러 컵라면에 호빵을 챙겨 먹고 현장으로 간다.
현장은 아직도 어디선가 역한 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망자의 형 쯤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서는 아직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현장으로 뛰어들다 제지 당한다. 먼저 도착한 종수가 서둘러 스케치한 현장의 아침 그림을 들고 중계차가 있는 합동분향소로 향한다.
아침 9시. 분향소 부근에 가면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12시간을 울음 소리 속에 보낸 이천에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분향소에 들어오면서부터 다리가 풀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족들, 꺼억꺼억 울다가, 뚜우욱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드는 그들. 자꾸만 침을 삼키고, 실내인데도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카메라기자 6년째, 이제 이런 거 참 많이 봤는데 왜 이러나 하면서도 자꾸만 가슴이 뛴다. 슬프다.
어김없이 높으신 국회의원에 경찰, 소방서 관계자들, 고위 공무원들과 회사 관계자들, 심지어 얼마 전 대통령에 당선된 당선인까지 분향소를 찾았고, 그들이 현장에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속 사진사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대고 있었다.
가족들은 누가 왔던 간에 아들의, 그리고 남편의 이름만 써 있을 뿐인 위패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었고,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 얼굴 찍으랴, 우는 가족들 표정 찍으랴, 저절로 감정이 정리되어 가면서 여느 때처럼 그렇게 일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강당 쪽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가족들이 모여 긴급 회의를 한단다. 언제나 문제인 보상 때문에 열리는 회의라고 했다. 참 신기했다. 어떻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보상 문제부터 생각하는 것일까? 수많은 취재현장을 다녀도 그리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고의 현장에 관한 뉴스를 볼 때면 언제나 사고의 유가족들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보상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루 종일 가까이서 유가족들을 지켜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화마 속에 남편을 잃고 두 남매를 키워야 하는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자기도 왜 사람들이 그렇게 큰 사고로 가족을 잃고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보상 좀 더 받으려고 발버둥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그 당사자가 되고 보니 사고로 사망한 남편이 진정 원하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먼저 떠난 남편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기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가족들의 평생을 책임지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도의 보상을 원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기는 남편을 잃은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정당한 보상을 받기 위해 싸우기로 했다고 한다. 당장 애들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일하러 나가야 하지만 남편을 생각해 싸우기로 했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하늘에서라도 잘했다고 칭찬해주리라 믿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취재를 하면서 너무 깊이 취재원에 동화되어서면 안 된다. 일단 객관적인 취재가 힘들고 감정적으로 현장이 컨트롤 되지 않으면 바로 영상에 그 느낌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목격하고 일반인들이 평생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강렬한 현장을 다니면서도 기자들이 무당처럼 그 아픔을 가슴 한 켠에 두고 취재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화재현장에서 남편 잃은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그 슬픔과 상황에 동화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 아주머니 말이 맞다고 떠벌리지는 못한다. 그냥 가만히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알겠다고. 누군가 가족을 잃고 눈물 흘려가면서도 보상을 서두르고, 싸우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정상보 / SBS 영상취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