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U20 FIFA 월드컵’(20세 이하 청소년 월드컵)대표팀 선수 명단을 확인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아는 이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홍명보號 스타급 선수의 부재’ , ‘죽음의 C조’(대한민국, 독일, 미국, 카메룬) 등 대회 전부터 따라다니던 꼬리표들. 거기다 축구 출장 기간은 예측 할 수 없지만 조 편성을 보니까 본선 3경기 후 바로 오겠다는 선배들의 농담까지. 가장 쉬운 상대인 카메룬과의 첫 경기에서 2대 0 완패. 정말 이대로 끝인가?
다음 경기는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독일전. 골대 뒤에서 우리 선수들만큼이나 긴장한 나의 카메라 탤리가 경기 시작 휘슬과 동시에 켜진다. 지면 무조건 탈락인만큼 우리 선수들의 투지나 움직임, 조직력 등이 카메룬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지만, 상대편 골망을 쉽게 흔들지는 못했다. 결국 전반 33분 독일의 역습에 선제골을 내주면서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후반 22분 김민우의 기적 같은 동점골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남은 시간 내내 독일팀을 압박하면서 전원 분데스리거(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프로 선수)로 구성된 팀을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1대 1 무승부였지만 선수들도 스스로 경기에 만족했는지 박수를 치며 그라운드를 나갔다. 끝이 아닌가? 좋은 예감이 든다.
운명의 미국전이 열린 수에즈 ‘무바라크’ 경기장. 경기 시작 전부터 현지 교민과 유학생, 그리고 붉은 악마 원정 응원단의 목소리는 사막의 거센 모래 바람을 잠재우듯 강렬했다. 상대하기가 만만찮을 거라는 미국 팀은 선제골을 내주자 쉽게 무너졌고, 우리 팀은 압박 수비와 철저한 조직력을 앞세워 3대 0으로 완승을 하며 16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모든 선수들이 한국 응원단석으로 뛰어가 한가위 맞이 큰절을 올리는 세리머니는 오늘의 하이라이트. 그라운드에서 추석을 맞게 된 나 역시 가슴이 뭉클해지며 대표팀과 응원단에게 카메라 포커스를 맞춘다. 내 옆의 외신 기자들도 좋은 그림꺼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댄다.
드디어 카이로 행! 사실, 할 거 없고 볼 거 없는 운하의 도시 수에즈보다는 그래도 창을 통해서나마 관광이라도 할 수 있는 카이로가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잠깐 동안 설레었다.(사실 시간이 없어 수에즈 운하조차 보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수에즈로 이동하느라 하루를 날린 우리 대표팀에게는 하루밖에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하루의 연습 시간도 대표팀 버스 유리창이 깨져 지체되고, 대표팀을 호위하는 경찰 호송차가 연습장 가는 길을 헤매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또다시 낭비해야만 했다. 경기장 잔디도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이틀을 충분히 쉰 파라과이팀에 비해 휴식 시간도 부족해 여러모로 안 좋은 상황이었음에도 우리 대표팀의 사기와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좋아 보여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버스 유리창이 깨진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카이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무바라크’ 경기장보다 경비가 삼엄하고 취재팀이 경기장 내로 들어가는 절차 또한 까다로워 짧은 영어로 여러 번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그라운드로 내려갈 수 있었다.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 크기에 비해 우리 응원단의 규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함성 소리는 90분 경기 내내 경기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경기 전반을 득점 없이 마친 후 반대편 골대로 걸어가면서 함께 간 선배가 “용한아! 후반에 두 골만 찍어봐라”는 주문에 호응이라도 하듯 태극 전사들은 파라과이를 상대로 거침없이 밀어붙여 세 골이나 뽑아냈다. 김보경의 선제골에 이어 김민우의 연속 두 골! 파라과이는 침몰했고, 우리는 1991년 남북단일팀이 출전한 포루투갈 대회에 이어 18년만에 8강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버스 유리창 사건은 다행히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이 났다.
예상보다 우리 팀 성적이 좋아서 출장이 하루하루 연장됨에 따라 취재팀의 기세는 선수들 못지않게 하늘을 찔렀으나 체력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아침 뉴스와 8시 뉴스용으로 선수단 스케치, 감독과 선수 인터뷰, 스탠딩, 오디오 등 보내야 할 분량은 많은데 인터넷 속도가 느려 송출을 마치면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70K bps 정도 나오던 속도가 계속 떨어지더니 5분도 안돼 1K bps까지 나오기도 하고, 경기장에서 무선랜으로 그림을 보내는 도중 FIFA에서 시간이 늦었다며 인터넷을 끊어 버리는 바람에 부랴부랴 숙소로 총알버스를 타고 날아가 아침 뉴스를 간신히 막기도 했다. 특히,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음 날 아침 뉴스에 댈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불안한 인터넷 환경은 나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곤 했다.(시차-이집트가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아프리카의 강호 가나와의 8강전. 이기면 1983년 멕시코 대회 이후 26년만에 4강 진출이다.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만큼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은 대단했다. 삐익! 휘슬과 함께 시작된 90분의 경기 내내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지만 결국 3대 2로 패하고 말았다. 잔인한 종료 휘슬과 동시에 가나는 웃고 대한민국은 울었다. 비록 아쉽게도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U20 FIFA 월드컵’은 세계에 대한민국의 축구를 또 한번 각인시켰음이 분명하다. 참가국 중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던 한국이 세계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맘껏 기량을 뽐냈으니까 말이다. 이집트에서 축구는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대회를 취재하는 내내 곳곳에서 한국팀 최고다, 한국이 이기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수없이 많이 들었을 정도로 대한민국팀의 플레이는 이집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 듯 했다.
“대표팀 선수 선발에 100퍼센트 만족한다. 모두 너무 잘해줬다”는 홍명보 감독의 말과
“스타 선수는 없지만 스타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신다. 우리까지 스타면 감독님과 코치님이 죽는다” 는 김보경 선수의 대답은, 바로 선수를 믿어주는 감독, 그리고 자신들을 낮추고 감독과 코치를 높일 줄 아는 선수들이 하나가 되는 분위기가 8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낸 비결이 아니었을까?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길어진 18박 19일 간의 장기 출장.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옆에서 젊은 태극전사들의 땀과 투지, 그리고 열정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SBS 이용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