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 인터뷰
戰後 5년… 또 3차 대전이 터진 줄 알았다…
1950년 긴장과 공포 속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 실어
지난 6월 7일,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앞두고 당시 미군에 종군했던 앙리 드 튀렌 (Henri de Turenne, 이하 튀렌) 기자를 만났다. 튀렌 기자는 1966년부터 약 7년동안 방영된 “대전투(Les grandes batailles)” 라는 세계 전쟁사 다큐멘터리를 통해,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접근 방법으로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서 방송관계자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역사프로그램의 연출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지난 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총망라한 “아포칼립스(Apocalypse)”라는 여섯 편의 다큐 시리즈 공동저자로도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그의 초창기 기자생활이 한국전쟁 취재로 시작했다는 점은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게 벌써 60년이나 지났다니… 나에겐 참 특별했던 경험이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아흔을 앞둔 그의 얼굴에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연합통신(AFP)과 일간지 르피가로(le Figaro) 기자였던 그가 전쟁이 나자 한국특파원으로 발령받았던 당시 나이는 28세.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잘 몰랐던 때 일이다.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는 한국이 LG, 삼성, 현대 등 훌륭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만드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 외에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어요. 나 또한 편집장이 한국에 큰 전쟁이 났다며 빨리 출국해야 되겠다고 했을 때, ‘거기가 대체 어딘데요?’라고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나자 그 후 약 일주일 정도 후 튀렌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참 다른 세상이야기지요. 당시는 직행으로 한국에 가는 항공편도 없어, 여러 번 환승을 했어요. 이집트 근처 중동 지역에서 한번, 뉴델리, 방콕, 홍콩을 거쳐 도쿄에 있는 AFP지사에 도착했지요. 취재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언제나 신속정확한 보도가 중요한 기자들에게 당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화였어요. 전화를 걸어 파리 본사에 취재한 결과를 알려야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 때문에 기자들은 매일같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일본을 매일같이 왕복했어요. 낮에 전쟁터에서 전쟁의 추이와 군이나 경찰, 피난민들의 상황을 기록한 후 매일 저녁 비행기로 일본 하네다에 내립니다. 거기서 도쿄 지사에 전화를 걸어 이 취재결과를 알리고, 도쿄에서는 파리 본사에 라디오 전파를 통해 이를 전달했습니다. 이 과정 또한 복잡했지요. 기술 사정에 따라 파리까지 직접 전파를 보낼 수가 없어서, 아프리카 콩고 브라자빌에 소재한 AFP지사에 보낸 후, 그 곳에서 파리로 취재기록을 보내곤 했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날 다시 한국에 가서 전쟁 취재를 하고 저녁 때는 하네다로 날아와서 취재결과를 본사에 전달하는 일상을 거의 매일 반복했지요. 매일 저녁 한국에서 일본에 갈 때는 부상자들과 함께 가고, 다음 날 아침에는 군수물자나 수혈용 혈액 등을 싣고 가곤 전쟁터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현장에서 고화질 HD화면으로 촬영된 취재영상을 인터넷이 가능한 곳이면 단시간 안에 방송사에 보낼 수 있는 요즘 촬영기자들에게 튀렌 기자의 경험은 정말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이처럼 세계사의 현장에서 어렵사리 취재한 결과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그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는 어떠했을까. 프랑스에서 첫 TV뉴스가 방송된 1949년,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유 가구 수는 약 3,700 가구. 전체 시청률 고작 1%도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대중들에게 텔레비전 화면보다는 라디오나 신문이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 튀렌 기자를 포함해 한국에 파견됐던 4명의 종군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 전쟁 소식은 유력 일간지였던 르 피가로의 헤드라인에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나라 이름조차 생소한 프랑스 국민들에게 극동의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소식들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해진다.
“당시 전쟁 영상을 촬영했던 기자들은 최신장비를 갖추고 있던 미국 기자들 몇 명뿐이었어요. 이들이 찍은 영상이 극장상영용 뉴스에 소개됐지만 프랑스 텔레비전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식은 거의 없었지요. 프랑스에도 TV수상기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우리 신문기자들이 현장에서 전쟁의 여러 모습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후 이를 가능한 빨리 본국에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중요했던 때입니다. 그래야 한반도 밖에서도 이러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처음 제가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를 포함한 언론인들은 물론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에서는 드디어 3차 대전이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먼 극동의 이야기지만, 공산권과 미국 사이의 분쟁이라는 소문은 2차대전이 종전한 지 5년이 채 안된 유럽에서는 또 다른 국제전의 서막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45년 2월 얄타 회담 이후 전 세계는 이미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한국도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그런 분단국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취재를 떠나야 했던 저 또한 겁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현장에 가서 실제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알아보고 세상에 그것을 알려야 되겠다는 ‘기자정신’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습니다. 해방 직후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의회의 약 60%를 좌익 정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당 기관지들은 한국전쟁의 시작이 미국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오보로 여론몰이를 했죠. 게다가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반미감정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허위보도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이 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제 동료들이 썼던 르 피가로지(紙)의 기사들은 전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실제 군 내외 분위기는 어떠한지, 피난민들의 상황과 폭격피해 등을 입은 시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지요. 저는 낮에는 AFP 본사에 보낼 각종 전황이나 미군, 영국군 측의 상황과 관련된 속보 기사 작성을 하고, 저녁 때는 그 외에 여러 현장 일화들, 즉 크고 작은 도시나 시골의 치안유지 상황이나 기아와 추위에 헐떡이는 비참한 피난민들의 현실에 대해 가능한 자세히 묘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취재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나는데,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한겨울에 어느 작은 도시가 네이팜탄 공중폭격 맞은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에요. 그곳이 네이팜탄으로 인해 한번에 붕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찾아갔는데, 모든 주민들이 죄다 타버려서 시커먼 숯으로 변해있었어요. 폼페이 화산폭발 때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이 동상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거기다 눈까지 왔는데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까맣게 타버린 사람들 시체 위로 하얀 눈이 내리니까 진짜 동상처럼 이러고 있더군요. 한 남자하고 아이가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이렇게 얼어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해 한국의 겨울은 정말 추웠어요. 영하 30도쯤 되었을까. 전선에서 다쳐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도 매번 위스키 두어잔을 마시고서야 속을 좀 데우곤 그랬습니다…”
튀렌 기자의 머릿속에는 6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런 끔찍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지, 그는 취재 당시를 떠올리며 손짓으로 그 때 본 모습들을 재현하며 보여주었다.
“제가 주로 취재했던 쪽은 미군 측의 상황이나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유엔군 측의 전략 등이었기 때문에 민간인 취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고, 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그렇게 잦은 소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참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취재하다가 마주치면 그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도 좀 건네주고, 쉴 곳도 마련해주고 그랬거든요. 또 전쟁고아들이 그렇게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본 전쟁 고아들 중 열여덟살 정도 되보이는 젊은이들은 가끔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 숙소로 와서 기자들과 영어로 이야기 하면서 먹을 것도 얻어 먹곤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민간인 취재를 하곤 했죠. 그러다 정말 친해지고 그런 경우 취재가 끝나 프랑스로 떠날 때 그 아이들을 데려가서 입양하는 기자들도 있었어요.
인민군이나 남한군 헌병들이 양민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이나 부역자 처벌을 하는 현장도 취재했었고, 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국군-유엔군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평양 진격 때까지 미군들을 따르면서 평양에서의 전황 역시 기사로 썼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김일성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기사를 썼을 겁니다. 사실 그에 대한 인물 정보를 찾기 위해 서울에서 영자신문들을 다 뒤져봤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가 전세계에 당시 북한의 원수가 어떤 인물인지, 어디서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 등 세세한 정보를 알리는 데 공헌을 했죠.≫
튀렌 기자는 그 후 약 1년 반 정도의 한국전 취재를 마친 뒤 프랑스에 돌아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Coree, 1951, 줄리아르 사 출판)″이라는 취재집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그 저널리즘 정신으로 1951년에는 ‘알베르 롱드르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는 매우 권위있는 언론상인 알베르 롱드르 상은 1933년 유명한 프랑스 기자였던 알베르 롱드르의 죽음을 기려 제정되었는데, 이 후 매년 용기있는 기자정신을 보여준 40세 이하의 젊은 언론인들에게 수여해왔다. 튀렌 기자는 1960년대부터 스스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활약하면서, 영상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베르 롱드르의 정신을 보여준 촬영기자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85년 다큐멘터리 부문을 신설하여 이에 걸맞는 우수한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이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판 ≪ 방송 카메라기자상 ≫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전 취재는 저에게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인 경험입니다. 기자가 되고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한데다, 최초의 전쟁취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는 4년 정도 AFP 워싱턴 특파원으로 파견됐고, 그 후 프랑스 수와르라는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주간지 엑스프레스의 부주간을 역임했습니다. 66년부터는 프랑스 국내에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그 영향력이 훨씬 커지면서, 방송 분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생각해보면 펜대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편집데크로, 문명의 발달을 몸소 체험한 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긴 여정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초심(初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저널리즘 정신이지요. 제가 처음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세상을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40년부터 4년이나 계속된 나치 점령시기는 저에게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마치 전쟁포로처럼 사는 듯 했지요. 라디오를 켜면, 또는 신문을 펼치면 죄다 나치 점령군 또는 비시 정부의 프로파간다들로 가득찼으니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바로 기자라는 직업을 생각했습니다. 실은 저희 집안 어른들은 대대로 외교관과 군인 장교를 지내왔고, 제 부친 또한 1차 대전 당시 공군장교였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외교관이나 장교가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지만, 저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죠. 해방 후 AFP 기자가 되고는 베를린에 4년 정도 특파원으로 나가, 냉전체제로 분단된 세계의 실상을 똑바로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
튀렌 기자의 이러한 저널리즘 정신은 이후 영상 분야에서도 그 빛을 발하면서, 그는 30여년 동안 현재의 시각에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저널리즘과 역사를 결합한 시각의 다큐멘터리나 여기에 픽션적 요소를 가미한 팩션 다큐멘터리 등의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 수만 100여 시간에 이르며, 그 작품들 덕분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영상역사가’라고 지칭하지만, 제가 영상을 가지고 해온 일은 단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테마들을 소재로 장단편의 ‘르포’를 만든 것입니다. 저는 거창한 역사가가 아니라, 모든 기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대중들이 어렵거나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에 좀더 쉽우면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아쉽게도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적이 없네요. 제 스스로 여러 번 기획을 제안해봤지만, 이 곳 방송 관계자들은 이에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이 난 지도 벌써 60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여러 목소리를 담은 더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 ≫
한국전쟁처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이 영상화된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에 튀렌 기자는 다소 아쉬운 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각종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좀더 양질의 관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한국은 물론 해외의 젊은이들이 잊혀져가는 이 전쟁에 대해 반드시 알아가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한국 촬영기자들에게 선배기자로서 한마디를 남겼다.
≪ 한국의 촬영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지나치게 신속한 취재는 삼가달라는 점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속도 경쟁의 시대가 된 오늘날, 아무리 빨리 취재하여 보도를 한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으면 기사로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난 루마니아 내전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 학살된 현장을 보여주겠다고 촬영된 영상이 알고보니 한 병원에서 시신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찍혔다고 드러난 사례는 유명합니다. 그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이 방송으로 나갈 당시에는 학살 현장에서 찍힌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확인한 이가 없었으니까요. 취재 대상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자주 사실 진위여부를 확인해보고, 더 자세히 묘사하여, 시청자들에게 빠른 시간안에 현장의 생생함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효진 / 프랑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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