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인양 취재기
“서울MBC에서 오셨어요? 저리 가! 빨리 저리 안 가?”
1080일. 오랜 시간 바다 안에 있던 세월호가 반잠수선의 도움을 받아 목포신항에 접안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이후로 인양작업이 순탄치 않았던 것과는 달리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큰 애로 없이 목포로 옮겨졌다. 미수습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고대하던 순간. 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3년여 만에 세월호를 다시 찾았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목포신항 안에 있었고 유가족들은 목포신항 울타리 밖에 천막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스케치하던 나에게 유가족 중 한 분은 그렇게 단 세 마디를 건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건 지난 시간동안 잊지 않은 멍에 때문이다. 그날 저녁 숙소에 들어가 TV를 켜니 목포MBC 기자가 세월호 인양에 관한 뉴스를 상세히 전하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 3년 전 진도 팽목항에서도 느꼈던 참담함이었다.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라는 대형 오보를 내보낸 방송사. 민간잠수사의 죽음이 세월호 유가족의 조급증 때문이라는 리포트를 내보낸 MBC의 기자라는 멍에를 지고 나는 현장에 있었다. 부감을 촬영하러 건물에 올라가면 주먹만한 돌이 날아왔고 삼각대 위에 올려놓은 카메라가 미수습자 가족 텐트를 향하기라도 하면 어디선가에서 보고 계시던 미수습자 가족들이 험한 말을 쏟아내셨다.
몇 달 뒤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모여 안산에서 여의도까지 도보행진을 했다. 진실을 알려달라는 그들의 목소리와 걸음걸음을 온전히 담고 싶었다. 그리고 짊어진 멍에를 조금이라도 더 무겁게 느끼고 싶어 부지런히 같이 걸었다. 학생들과의 접촉과 인터뷰는 자제해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에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다가와 물었다.
“왜 촬영하시는거에요?”
진실을 밝혀달라는 학생들의 외침을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몇 분 전에 기사는 단신으로 밀린 상황이었고 그마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식을 취재기자를 통해 이미 전해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학생과의 접촉을 피하려 잠시 자리를 옮겼다.
그날 저녁 뉴스에 학생들의 도보 행진 소식은 한 줄로 요약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안산 단원고 생존 학생들은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학교에서부터 1박2일의 도보 행진을 벌여 국회에 도착했습니다.
닷새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유가족들은 특별법을 처리하라며 국회 본청에 진입하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2017년 4월 4일 목포신항 브리핑실. 김창준 선체조사위원장이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하이샐비지 측이 예상하는 세월호의 중량이 갑자기 늘어나서 세월호 육상 거치가 연기될 수 있다. 반잠수식 선박 거치 상태에서 미수습자 수습을 시작할 수도 있다.”
조용히 브리핑을 지켜보던 미수습자 어머님 한 분이 큰 소리로 항의했다.
“아이 찾는 걸 우리에게 합의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주고.......내 딸을 찾는데 내가 말할 권리가 없는 나라다. 내가 들어가서 내 손으로 다 찾을 것이다.”
하루빨리 자식을 찾고 진실을 찾기 위해 인양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던 그들. 지난 3년 동안 자식을 가슴에라도 묻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온 그들을 목포MBC 기자들과 나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나의 취재들은 그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김경락 /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