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첫 공판 취재기
지난23일, 전직 대통령 박근혜 씨의 뇌물 혐의 첫 공판이 있던 아침. 법조 포토라인은 각각의 포인트마다 수십 명의 취재진들로 들썩였다. 서울구치소, 법무부 호송버스 하차 포인트, 417호 대법정으로 이어지는 중앙지법 출입구, 단 2분여 동안만 촬영이 허가된 법정 내부,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법원 철문입구 돌발 상황까지... 지난 3월의 검찰 출석과 구속영장 발부에 이어 또 한 번의 대규모 법조취재 풀단이 꾸려졌다.
TV로 방송되는 화면은 사안 핵심에 집중해 단정히 정리된 영상으로 채워지지만, 현장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보고 겪게 된다. 단연코 지난 5월 23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은 당일 봉하마을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핫한’ 장소였을 것이다.
9시 10분경, 남색 코트 차림에 1,660원 짜리 플라스틱 집게핀으로 올림머리 스타일을 고수한 전 대통령 박근혜 씨가 호송차에서 내리자 취재진은 놀라움에 웅성거렸다. 수감생활로 다소 초췌해진 착잡한 얼굴빛 말고는 구속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외양. 이날 법정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던 박 씨의 속마음이 복장과 스타일의 표출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믿고자 하는 전직 대통령, 죽은 권력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공명심을 전시하는 태세전환의 일부 언론, 법원로 삼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시청하며 실시간으로 흐느끼는 태극기 시민들, 역사적 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긴 시간 줄서서 기다리는 진보적 시민들, 미리 가족 방청을 신청해야 한다는 것에 무지해 발길을 돌려야 했던 동생 박근령 씨 내외, 법정 출입을 허해 달라 소란을 피우던 태극기 티셔츠 차림의 장애(본인 주장) 노인. 그곳은 그렇게나 다종 다기한 이질적 욕망의 주체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장소였다.
그토록 단단해보이던 정치권력의 하릴없는 몰락.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읊던 길재의 심상이 바로 호송 버스에 탄 옛 권력자의 심정 아니었을까. 수인번호 ‘나대블츠 503번’ 배지는 얼핏 브로치마냥 박근혜 전 대통령의 푸른색 코트와 맞춤해보였다. 청와대가 바뀌고, 뜨거운 뉴스들 속에 몇 주간의 초현실적이던 나날은 박 전 대통령 1차 공판 취재를 하면서 내게 비로소 현실감각을 일깨워줬다.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 덕에 얼핏 우리 언론 지형이 바뀌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자·타의적으로 부역했던 방송은 내부적으로 얼마나 바뀌고 있는가.카메라기자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빠짐없이 찍고 기록해두려 애써왔다. 하지만 그것이 취사선택 되고 활용되는 ‘과정’의 책임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권력자와 재벌가가 처벌받게 된 지금에도, 마치 변검(變臉)처럼 제 민낯을 바꾸기 시작한 태세전환의 방송언론 적폐는 언제쯤이나 정돈할 수 있을까. 방송 내부 주체들 간의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초현실이 현실로 돌아왔다.
지선호 / KBS 영상취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