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할 수 없는, 여행을 위하여
▲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필자
9시 15분 피렌체행 기차는 2시간이나 연착됐다.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토스카니에서 지진이 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넘어 진 김에 쉬어간다.’ 생각하고 아침을 먹고 있는데 연착 시간이 9시간으로 바뀌었다가, 타고 가야 할 기차번호가 전광판에서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도착한 한 통의 이메일. 테르미니(Termini) 역에서 출발 예정인 기차가 트리부르티나(Triburtina)역에서 30분 뒤에 출발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역에서 출발해야 할 기차가 영등포역에서 출발한다는 안내를 받은 것과 비슷했다.
바뀐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0분. 배낭은 무겁고 일정이 엉망이 돼버려 화도 났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나는 휴가 중이고 바쁜 것도 없었다. 짜 놓은 일정은 변수가 고려되지 않은 그저 ‘계획’일 뿐이다. 여행을 다니며 짜 놓은 일정대로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변수가 발생했고 여행이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여행은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일상의 지루함과 반복된 패턴을 벗어나 ‘처음’이라는 가슴 두근거리는 상황과 마주하는 행복한 모험이다. ‘처음’은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을 만들어내는데 더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이 하루를 견뎌내는 이들에게 마술 같은 힘을 발휘한다. 새내기 대학생 시절에 느꼈던 아련함, 서툴렀던 신입사원 시절에 가졌던 용기.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고 아련한 옛 시절만큼이나 강한 향기를 뿜는다. 길을 잃는 묘미는 여행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대만 여행 중 번호를 헷갈려서 탄 버스 덕에 내 생애 최고의 우롱차를 마실 수 있었다. 날은 무더웠고 세워놓은 계획은 꼬일 대로 꼬였지만, 그날 먹은 차 한 잔에 모든 근심을 훌훌 날려버렸다. 어쩌면 닿지 않았을 인연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이 부린 마법은 운명도 거부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19가 발생 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감염되고 사망했다. 신천지 사태로 한국도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뉴스로 본 이탈리아 풍경은 더 참혹했다. 얼마 전까지 거닐던 도시들은 봉쇄됐고 감염자 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났다. 국가 간 이동이 중지됐고 여행은 물론 일상도 멈췄다.
코로나 19는 일상만 망쳐놓은 것이 아니다. 모험하는 재미와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을 겪는 재미까지 중지 시켜 버렸다. 익숙 함에 지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반복되는 것에 신음한다. 여행은 중단되었고 비행기가 공항의 주기장에서 날개를 펼 날 만 기다리고 있다. 처음 보는 풍경과 처음 들어 본 언어, 기꺼이 낯선 이방인이 되기 를 주저하지 않던 기억이 그립다.
김회종 / MB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