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路)의 재발견
▲ 성산대교 밑 보도 한쪽에 잠자리를 사냥한 거미의 모습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됐다. 첫 보도는 원인 모를 폐렴으로 우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이것이 나의 삶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2020년 10월 말 현재,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코로나19 소용돌이 속에 목숨을 잃는 중이다. 코로나19라 불리는 전염병은 한 명이 동일 공간에 있다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여러 명을 감염시킬 수 있고 밀집, 밀폐된 곳에서는 전염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한두 명으로부터 시작된 후에는 인적 네트워크가 여러모로 감염 확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삶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2020년 3월. 많은 기업이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대중교통 이용이 마음 편하지 않다. 생면부지의 불특정 다수와 함께 좁은 공간에 밀폐되는 일은 이제 감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나의 길(路)의 재발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직선거리 7km의 도보 출근. 첫 시작은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행위로써의 걷기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중독되고 말았다. 한강 산책로를 따라 여의도까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로 90년대와 2000년대 가요를 듣는다. 특정 가요가 유행했던 옛날, 개인적 경험들이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서 소환된다. 내 기억 속 검색 주제어는 가요 제목인 것 같다 - 나는 기억 소환 해시태그#라 부른다. 이승환의 ‘천일동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등. 이런 기억의 소환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는 마법 주문 같은 경험을 한다. 잊은 채 살아가고 있던 일, 기억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것 등을 불러내는 것이다.
소환된 추억을 곱씹으며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와 함께 한강 산책로 아스팔트 위를 한 발짝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다. 신기한 것은, 탁 트인 한강변에서 불어오는 뒷바람을 맞으면 평균 두 시간 남짓 걸리던 것이 대략 15분 정도 단축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맞바람을 맞으며 걸을 땐 우선 무척 괴롭다. 모자가 뒤집힐 듯 날리고 눈도 게슴츠레 떠야 한다. 한 손은 모자를 붙잡고 상체는 바람을 맞으며 몸을 구 부정히 한 채 걸어야 한다 - 인간이 바람에 맞서는 본능적 자세다. 바람은 걸음을 도와주기도 하고 때론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마주 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해 보지만 사실 이런 때 사람 구경은 돈 주고 살 만하다. 사람들 각각의 외모도 외모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얼굴과 몸짓 손짓에서 그(그녀)의 삶의 궤적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를 준다. 상대방도 나를 힐끗 보다 시선을 돌린다. 서로가 서로를 살피고 탐색한다. ‘그’ 또는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멋진 사이클의 행렬에 이어 어느 순간 따릉이들 한 무리가 바로 옆 아스팔트 위 페인트칠로 경계를 이룬 자전거도로를 쏜살같이 (때론 강바람을 만끽하듯 여유를 부리며) 지나간다. 마스크를 썼지만, 그 순간만큼은 코로나19도 잊은 듯한 행복감이 마스크 너머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일부러 가식적으로 지을 수 없는, 마음이나 가슴에서 표현되는, 행복한 표정들의 행렬이다.
앞만 보고 갈 때. 주위를 살피며 걸을 때. 어제는 못 본 대상,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오늘 보이는 경험. 오늘이 어제가 되었을 때, 내일, 또 다른 새로운 발견이 일어난다. 물론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한 달 동안 같은 길을 오갔는데 굉장히 낯선 시설물이 눈에 들어온다 - 낡고 허름하다. 처음 본 것 같다. 하지만 실은 최소 십수 년을 그 자리를 지켰을 시설물이다. 단지 내 뇌의 저장을 담당하는 기억 속에 입력이 안 됐을 뿐이다. 아마도 조물주가 인간 뇌가 터질까 봐, 아니면 기억이 아닌 창의적인 생각 좀 해보라고 일부러 망각이라는 여유 공간을 남긴 걸까?
저장된 기억의 소환에는 필히 모종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오늘도 길 위를 걸으면서 주위를 잘 살피고 관찰하지만 놓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은 놓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반복’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한강변 산책로 귀퉁이 늘 같은 자리에 있던 거미. 평상시에는 잊고 있다가 뇌 속 기억을 소환하는 연결고리가 벼락 치듯 번쩍하고 이어지면 문득 생각난다. 성산대교 아래 한강 펜스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거미 녀석. 잠자리 날개를 잘 포개어 놓고 거미줄로 단단히 고정한 채 맛있게 포식 중이던 녀석이다. 아니, 정정한다. 거미 녀석이 아니라 그냥 거미로 불러야겠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거미에 대한 나의 지식으로는 모를 일이다. 검색하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귀찮다. 암튼 한동안 그 거미를 잊고 살았다. 내 기억에 있는지조차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한강변을 걸으며 우연히 다른 펜스에 횅하니 한가운데 500원 동전 크기의 구멍이 뻥 뚫리고 거미는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는 주인 없는 거미집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기억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기억 속 어둠의 심연 속에 파묻혀 있던 성산대교 밑 그 거미가 번쩍하고 생각난다. 잠자리 체액을 쪽쪽 빨아먹으며 포식하고 있던 그 거미.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 거미가 있던 곳으로 가본다. 지형지물을 확인하고 위치를 가늠해 도착해 보니 회색빛 보호색으로 몸을 위장한 채 다리는 얼룩무늬를 띄고 있는 것이...여전하다. 거미줄 한가운데 거미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무사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거미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을 알고 있다. 그날 이후 그 거미는 내 기억 속 어둠의 공간에 또다시 던져서 다시 기억할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로 걷기 중독자가 된 나는 오늘도 길(路) 위를 걷는다. 걷다 보면 세상이 한없이 높은 벽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자신감이 충만해질 때도 있다. 잘 닦인 길 위를 걸으며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치 않게 보이는 뭔가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나를 길(路) 위의 방랑 중독자로 만들고 있다. 길(路)이 작고 소소한 관심이 주는 삶의 재미와 성찰을 선물했다.
김상민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