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343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수정 삭제


흑백으로 되살린 전쟁범죄의 기억-『지슬』

영화가 시작되면 마루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이 보인다. 그 뒤로 방문이 열리면서 군인이 등장하고 카메라가 좀 더 들어가면 이불장에 걸친 여자의 시신이 보인다. 군인은 그 앞에서 동료와 함께 칼로 과일을 나눠 먹는다. 한국군에 의한 최초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렇게 관객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지슬’(오멸 감독 연출)의 첫 시퀀스에 제시된 제기와 칼은 이 영화를 규정짓는다. 제기는 망자(亡者)의 영역이고 칼은 육체를 가진 생명의 것이다. 이 두 물질은 또한 희생자와 가해자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연기의 표면과 그 이면에 깔린 여러 의미들을 관객들이 해석하도록 초대하는 역할도 한다.
이 영화는 제주의 ‘4·3 항쟁’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해방공간 당시 제주도에서 진행되던 이념대립이 1947년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로 악화되고 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미군정은 경찰과 테러집단인 서북청년단으로 진압하려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전쟁상황으로 발전하자 미군정은 국군의 전신인 경비대에 진압을 명령하고, 그해 8월 15일 이후 이승만 정권은 한국군을 파견하고 11월 7일에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한국 정부는 이날 포고문을 통해 ‘해안에서 5km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한국군에 내렸다. 영화 ‘지슬’은 그 때, 거기에 있었다는 불합리한 이유로 학살당한 농민,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의 피난 생활과 그들을 ‘토벌’하는 계엄군의 행위를 스크린에 재현한다.
이 영화는 신위(神位, 영혼을 모셔 앉히다), 신묘(神廟, 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 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눠 먹음), 소지(燒紙, 신위를 태움)라는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각각의 시퀀스마다 한국군의 야만적인 행위와 대비되는 피난민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신위에서는 피난가는 주민들을 영화 속으로 불러 관객에게 소개시키고, 신묘에서는 주민들의 개인적인 사연들을 들려준다. 음복에서는 피난 주민들의 피난생활과 희생당한 어머니가 남긴 불에 탄 감자를 나눠주는 아들과 그것을 먹는 모습이 그려지고, 소지에서는 각각의 희생자들에게 모셔진 지방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
오멸 감독은 한국군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 에둘러 가지 않는다. 마약성분의 진통제에 중독된 군인이 보이고, 살인에 대한 충동을 칼 가는 걸로 해소하는 살인귀(이 군인은 나중에 다리가 아파 피난가지 못하는 할머니를 ‘빨갱이’이며 도망친 빨갱이 어미라는 이유로 죽인다)가 등장하고, 추운 겨울 한라산 산간 마을에서 토벌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부하를 발가벗긴 채 학대하는 군인이 등장한다.
반면, 피난민에 대한 시선은 해학과 연민이 뒤섞여 있다. 좁은 산간 초소에 숨어든 피난민들이 엉덩이 둘 곳이 부족하다면서 서로를 타박하고, 집에 놔두고 온 돼지 걱정만 하는 할아버지, 피난보다 달리기 시합이 중요한 총각들, ‘이 산이 아닌가벼’를 계속 말하는 길잡이와 같은 평범하고 어리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 영화의 비극은 이와 같은 광기와 어리숙함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피난민에 감정 이입한 관객과 군인들 간의 대립, 즉 관객과 영화상의 폭력적인 국가권력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면서 영화의 비극은 현실화 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특이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 사건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희생자의 유가족을 제외하고 영화적인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영화가 현실의 문제로 제기하는 방식은 영화의 고유한 미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유려한 로케이션, 화려한 배우들의 연기, 현란한 편집으로 사건을 만들지 않고, 이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외국영화로 이해하게 만든다. 바로 언어, 제주어를 통해 그렇게 만든다. 한국어 내 사투리라고 머릿속으로 이해했던 언어를 자막으로 통해 관객들은 생경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들이 당시 고립됐던 제주의 상황, 피난민들의 사연을 간접 경험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무리는 비장하다. ‘이어도사나’라는 주제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어버린 어머니의 등에서 꼼지락 거리는 신생아에게 지방을 부여하고 태워버리는 감독의 미장센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방은 영화 속에서 죽은 모든 인물들에게 헌정되었다. 그걸 보면서 관객은 감독이 마련한 제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1. 병아리 깃털과 초콜릿 상자

    병아리 깃털과 초콜릿 상자 ▲ 일광욕을 즐기는 얄리와 쎵 떠오른다. 10대 때 아주 힘들게 읽어나갔던, 책(데미안)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그 구절이 어렴풋이 떠올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
    Date2020.11.17 Views390
    Read More
  2. 방종혁의 씨네노트 - 사극의 두 얼굴, 허구와 실화 '군도-민란의 시대' VS '명량'

    사극의 두 얼굴-허구와 실화 -‘군도-민란의 시대’ vs ‘명량’ ‘군도-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와 ‘명량’이 개봉됐다. ‘군도’는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이고 ‘명량’은 이순신이라는 실존 인물과 ‘명량해전’을 바탕으로 제작된 실화라고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Date2014.08.14 Views3334
    Read More
  3. 방종혁의 시네노트 - 흑백으로 되살린 전쟁범죄의 기억-『지슬』

    흑백으로 되살린 전쟁범죄의 기억-『지슬』 영화가 시작되면 마루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이 보인다. 그 뒤로 방문이 열리면서 군인이 등장하고 카메라가 좀 더 들어가면 이불장에 걸친 여자의 시신이 보인다. 군인은 그 앞에서 동료와 함께 칼로 과일을 나...
    Date2013.06.04 Views3434
    Read More
  4. 방송환경의 변화에 영상기자들의 변화

    방송사 입사하기 전에 방송사 취업을 준비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방송과 다른 학과를 전공했고 주위에 관련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입사준비를 하긴 쉽지 않았다. 당시 입사 시험에 참고할 자료가 부족해서 그나마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Date2018.01.10 Views716
    Read More
  5. 박주영의 세상보기 - 역경은 창조주가 준 선물

    삶은 거대한 산과 같다.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심신(心身)을 단련해야 하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육체적 장애와 정신적 나약함으로 중간에 포기하거나 장애물이 나타나면 도전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
    Date2014.03.21 Views2159
    Read More
  6. 박수칠 때 떠나자: 한국 언론의 국제뉴스의 자립 선언

    [2023 광주민주포럼 발표문 요약3]  박수칠 때 떠나자: 한국 언론의 국제뉴스의 자립 선언  김성해 (대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국제뉴스를 향한 타는 목마름과 분열의 자화상: 미,영의 언론들을 통해 세계를 보아 온 한국 언론의 관성과 학습된 ...
    Date2023.06.29 Views157
    Read More
  7. 민주주의를 위한 벨라루스의 투쟁과 한국의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2023 광주민주포럼 발표문 요약1]  민주주의를 위한 벨라루스의 투쟁과 한국의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미하일 아르신스키 (Mikhail Arshynski, 제1회 힌츠페터국제보도상 '기로에 선 세계상(대상) 수상자)  루카센코 장기독재에 신음하는 벨라루스 민주주...
    Date2023.06.29 Views158
    Read More
  8. 미디어의 속도와 책무감에 대해서

    미디어의 속도와 책무감에 대해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는 인류의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흔적이다. 이와 동시에 동굴 벽화라는 미디어가 발생했다. 아마 구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사용한 역사 기록 미디어는‘ 동굴 벽’을 벗...
    Date2018.12.19 Views539
    Read More
  9. 미디어 풍요시대, 필요한 건 미디어리터러시 교육

    미디어 풍요시대, 필요한 건 미디어리터러시 교육 스마트미디어의 등장은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미디어산업의 전반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모바일로 대표되는 스마트미디어는 기술적으로 미디어 이용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없애주었고, 미디어 이...
    Date2021.07.06 Views372
    Read More
  10. 무선마이크 900Mhz 전환기

    무선마이크 900Mhz 전환기 ▲MBN 영상기자들이 기획취재 장비운용계획을 의논하고 있다. 올해 새로운 무선마이크 장비를 지급받은 영상기자가 많을 것이다. 700Mhz 무선마이크 사용이 2021년 1월 1일부터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간 무선마이크 주파수로 사용하던...
    Date2021.01.07 Views1169
    Read More
  11. 무분별한 운영, 드론의 위험성

    무분별한 운영, 드론의 위험성 ▲ 지난 7월 18일 한 방송사에서 대구 스크린골프장 화재현장을 감식하고 있는 소방대원의 가까이에 드론을 날리고 있는 장면 4차 산업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론은 손쉽게 온·오프라인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소방...
    Date2019.09.09 Views446
    Read More
  12.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포스트 코로나 시대, 취재현장 보도 윤리·취재 방식도 변화 ▲지난 12월 21일 가족 새해 소망을 듣기 위해 방송사 취재진이 마이크 연장봉을 이용해 마스크 쓴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종로 경찰서 앞에...
    Date2021.01.08 Views406
    Read More
  13. 디지털 경험을 통해 새롭게 보이는 것들

    디지털 경험을 통해 새롭게 보이는 것들 현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경험, 누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럴 땐 현장에서 좀 떨어져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비슷한 원리로 도...
    Date2020.01.08 Views241
    Read More
  14. 드론의 구체적인 제도화가 필요하다

    드론의 구체적인 제도화가 필요하다 드론과 관련된 법규와 제도는 자동차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던 19세기 당시 영국의 시가지에는 마차가 즐비했는데, 이들과의 충돌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자동차에는 3명의 운전수를 태우고 이 중 한...
    Date2017.08.30 Views578
    Read More
  15. 드라마는 감독의 작품인가

    드라마는 감독의 작품인가 1. “습관이 이상하게 들어 시나리오를 집이나 사무실이 아닌 카페나 커피숍에서 쓴다. 영화가 개봉할 때쯤에 가보면 그 커피숍이 망해서 없어졌다.” 2020년 미국 헐리우드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
    Date2020.03.11 Views318
    Read More
  16. 도심 속 고궁 산책

    도심 속 고궁 산책 ▲ 올여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의 모습 “서울은 천박한 도시.” 지난여름,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서울을 가리켜 아파트값만 얘기하게 되는 천박한 도시로 표현해 논란이 됐다. 행정수도 이전의 필...
    Date2020.11.17 Views243
    Read More
  17. 데이터 저널리즘과 영상

    데이터 저널리즘과 영상 ▲SBS8뉴스/ 마부작침(데이터저널리즘) / 법원은‘또다른조두순들’에어떤판결을내렸나 ▲SBS8뉴스/ 마부작침(데이터저널리즘) / 키워드로본'스쿨존교통사고'…사각지대도확인 데이터 저널리즘팀의 뉴스가 새롭...
    Date2021.01.08 Views260
    Read More
  18.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KBS대전뉴미디어팀에서근무하고있는필자 지난 2월 KBS 대전총국 내 새로운 조직인 디지털 관련 부서가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갈망해 왔지, 사실 디지털 분야는 그...
    Date2021.01.08 Views427
    Read More
  19. 다시 찾아온 기회 그리고 설렘

    다시 찾아온 기회 그리고 설렘 2017년 4월 KBS 대전방송총국을 떠나 인구 10만의 작은 시골도시 충남 홍성으로 내려왔다. 내겐 입사 후 2번째 순환근무 지정이었다. 취재기자 2명과 영상기자 1명(나)이 7개 시, 군 지자체와 도청, 교육청 그 관련 기관들을 모...
    Date2019.05.08 Views303
    Read More
  20. 다기능 멀티플레이어가 요구되는 시대

    다기능 멀티플레이어가 요구되는 시대 모바일 저널리즘은 스마트 폰 또는 태블릿을 사용하여 뉴스를 취재하고 전달하는 프로세스로 정의할 수 있다. 스마트 폰의 발전으로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HD-ENG 카메라보다 더 화질이 좋은 4K UHD 영상을 촬영, 편집할 ...
    Date2017.07.21 Views688
    Read More
  21. 다가오는 '본격' 지방자치시대 지역방송사,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나?

    문재인 정부는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위해 ‘연방제’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실제로 정부내 이를 실현시킬 구체적 법과 제도를 강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부의 의존도를 낮추고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Date2018.01.10 Views64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