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4 03:25

필사는 창작의 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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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로 당대 최고 시인이 된 다산의 제자 황상



좋은 글을 베껴 써서 익히고 마음에 담는다는 ‘필사’의 열풍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서점에서는 필사책을 모아 놓은 특별 코너를 마련하기도 했고,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필사’라는 단어를 

넣어 보면 수백 권의 책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가히 ‘필사 열공’의 시대이다.

그런데 필사를 계속하면 문장력이 어느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까? 이런 호기심에 답하는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이가 조선시대 시인 황상이다. 


필사 유승현.jpg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제자인 그는 평생에 걸쳐 필사에 몰두한 인물이다.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필사하는 데 혼신을 다했고 그 결과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황상은 열다섯 살 때 강진에 유배 온 다산을 처음 만났다. 그해가 1802년 10월이었다(정민, 2011, 『삶을 바꾼 만남』 문학동네). 다산이 보기에 황상은 말귀 잘 알아듣는 명민한 아이였다. 하지만 어린 황상은 너무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혔으며 답답하기까지 하다며 자신을 낮추었다. 그때 다산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큰 문제를 일러주었다.


그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러다보면 머리만 믿고 대충 넘어가 공부한 바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도 문제라 했다. 그런 재주를 못 이기고 들뜨면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어 큰 학문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셋째로는 깨달음이 재빠를 때를 지적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투철하지 못하고 대충하고 마니 역시 공부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황상이 문학에 재주가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문학 공부의 방법으로 초서(抄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키도록 했다. 초서는 책에서 중요하거나 필요한 대목을 베껴서 따로 옮겨 적는 학습 방법이었다. 지금의 필사와 똑같은 것이다.


다산은 초서야말로 ‘하나를 배우면 열로 증폭하는 법’이라 했다. 그는 또 ‘아무리 이리저리 궁리하고 살펴 

따져 깊은 뜻을 얻는다고 해도, 떠오르는 대로 메모하고 기록해야만 실제로 네 것이 된다. 

그저 소리 내서 읽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책 한 권을 얻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보충할 것이 있으면 추려서 엮어야 한다.’고 했다. 초서를 제대로 하면 ‘책 1백 권을 열흘에 해치울 수 있다.’며 다산은 그와 제자들을 독려했다.


황상은 모든 열정을 문학에 쏟았다. 그는 끊임없이 초서하며 외우고 익혔다. 유행성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끓었을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학질에 걸려 끙끙 앓는 중에도 황상은 초서에 몰두했다.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았다. 스승은 학질이 빨리 떨어지라며 제자를 위해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은 ‘나이가 어리건만 학질에도 눕지 않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구나. 살과 뼈를 파고드는 고통에도 붓을 잡고 초서를 그만두지 않는구나. 학질을 견디며 등초한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글자들이 필획에서 조금의 떨림조차 없구나. 지금의 마음가짐으로 매진하려무나. 장차 너의 성취는 아무 의심할 것이 없겠다. 

나는 네가 이런 마음을 잃지 않고 문사(文史) 공부에 매진해서 우주의 만사를 다 네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을 믿는다.’며 어린 제자를 칭찬했다.


스승이 예견한 대로 황상의 성취는 놀라웠다. 황상은 시 방면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정민 교수는 그의 책에서 ‘황상의 시문집 「치원유고巵園遺稿」 권1에는 모두 서른 세 수의 부(賦) 작품이 

실려 있는데, 열여덟 살이던 1808년 5월에 완성한 것이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하며 주뼛하던 소년이 2년 반 만에 하루에 부(賦) 한 편을 짓는 변화는 놀랍다 못해 눈부시다.’며 놀라워했다.


후에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황상의 작품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재치원고후題巵園藁後」를 통해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황상의 시는 우레를 버팅기고 

달을 찢는 듯한 기상을 갖추고 있다. 깨달음을 얻어 일가를 이룬 시이다.’라고 평했다.


추사의 동생 김명희도 ‘황상이 다산의 가르침을 따라 당나라 두보와 한유, 송나라 소동파와 육유 등 

사가(四家)의 시만을 50년 넘게 익혀서 마침내 자기만의 독창적 언어를 수립했다. 사가와 스승을 배웠으나 하나도 닮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제대로 배우고 훌륭히 익힌 결과가 아닐 수 없다.’고 격찬했다.


황상은 예순일곱 살이 되던 해 봄 내내 「장자莊子」를 필사했다. 또 그 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중국 남송 시대 시인 육유의 시 1,000수를 필사했다. 황상의 마지막 문집 「치원소고巵園小藁」의 ‘차를 마시고서(茶後)’라는 시에서도 필사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잠에서 깨어 시를 쓰며 찌든 때 모두 떨쳐버리고 / 무료함 싫어 일 만들어보지만 공허하기만 하다 / 산림에 족적 숨기려니 몸을 병들게 하지만 / 하늘이 준 맑은 눈은 책을 베낄만하다......’ (출처 :김규선, 2012, ’만년기 황상의 사회시‘, 『동양고전연구』)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 그는 필사로 공부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며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올라 필사가 창작의 왕도임을 몸소 증명한 인물이다.


조영권

전북대 강의전담교수

전 YT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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