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미지의 올바름에 관하여
전 세계의 이목이 남북관계에 집중되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잡고 가상의 선에 불과한 국경선을 넘나드는 장면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놀랍고도 어지러운 반전’이라고 표현한 뉴욕타임즈의 논평처럼 이를 시청한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이미지의 강력한 충격을 함께 경험했다.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이 공유하는 미디어가 공통된 소속감을 불어넣어준다는 앤더슨(Anderson)의 ‘가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가 생각나는 이 장면은 글로 된 어떤 논평보다 영상이 가진 감성적 파괴력이 크다는 점을 뉴스 속에서 보여주었다. 이미지의 힘에 대해 손탁(Sontag)은 ‘내 인생은 그 사진들을 보기 이전과 그 사진을 본 이후로 나뉜다’는 말로 이미지가 주는 강력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영상저널리즘은 사실의 객관적 기록자로서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미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미지가 특정한 프레임을 배제시키거나 포함시킴으로써 특정 이슈를 부각하고 사회적 사건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영상프레이밍(Visual Framing) 관련 연구는 서구사회에서는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온 분야이다. 이들 연구가 공유하는 지점은 이미지는 사람들의 인지와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집단의 정체성을 사회에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 부시 정부가 규정한 ‘악의 축’과 ‘테러와의 전쟁’의 프레임에 미국 주류 미디어가 사용한 무슬림의 부정적 이미지가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들은 상당수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 이와 비슷하게 최근 난민이슈와 관련해서 미디어들이 난민들을 ‘경제적 이주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범죄 장면을 주로 부각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연구는 시리아 난민사태 이후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이들 연구 모두 이미지가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고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영국 런던대(UCL)의 조프(Joffe) 교수는 위험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미디어가 구체화하고 이를 사회화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미지는 강하고 대체불가하다. ‘빨갛다’라는 텍스트를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보아온 기억된 빨간색이듯, 이미지는 활자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정상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너무 평화로워서 그 자체로 전복적이고 충격적이었다. 그 동안 뉴스에 사용된 북한의 이미지는 천편일률적이었다. 미사일과 군사력의 전시, 혹은 기아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북한 뉴스 아이템에 항상 들어가는 전형적인 이미지였다면 일상적 장면과 풍경은 거의 찾기 어려웠다. 뉴스 프레임 자체의 정치적 한계 안에서 더욱 도드라졌던 이러한 고정화된 이미지들은 북한에 대한 별다른 소스를 접할 수 없는 시민들에게 유일한 상상력의 재료들이 되어 왔다.
이런 관성적 영상의 사용이 남북관계에 대한 공론의 장에 바람직한 영양분을 제공하여 왔는지, 아니면 극단적 대결과 분열의 정치적 수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왔는지 뉴스의 영상을 담당하는 직업인으로서 이제 비판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영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사회적 산물이기에 성숙된 영상문화는 ‘영상의 올바름’이 작동하는 생태계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당연함에 질문하지 않는 영상문화와 제작관행 속에서 살고 있다. 영상의 올바름에 대한 영국의 한 가지 사례는 이미지가 지니는 영향력과 사회적 쓰임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을 준다. 2016년 칸(Sadiq Khan) 런던 시장은 여성의 마른 몸(Skinny Look)을 사용한 이미지 광고들을 공공교통시설에서 금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살을 빼는 광고나 미용과 패션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사진들은 여성의 몸을 물건처럼 대상화시킬 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 그런 비현실적인 몸매를 추구하도록 자극하며, 결국 여성자체를 비하한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게 금지의 이유였다. 칸 시장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 사건은 ‘해변에 갈 몸이 완성되었어요(Beach body ready)’라는 광고였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의 몸을 사용한 광고들에 사람들이 항의를 하고, 이를 비판하는 온라인 청원에 시민들 7만여 명이 서명을 한 광경은 성형외과나 미용 혹은 운동 광고에 익숙해진 눈에는 참 생경했고, 이것을 강제하는 결정 역시 충격적이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미지의 당연함에 대해 이의제기하고, 이런 주장이 공론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우리가 부족한 것은 영상기술이 아니라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4시간 뉴스의 빠른 사이클에 맞춰 선정적인 아이템과 영상이 계속 사용 되는 악순환에 대한 반향으로 태동한 슬로저널리즘(Slow journalism)의 핵심역시 가속 페달이 아닌 브레이크에 관련된 것이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같음과 차이를 사회에 기입함으로써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화 작업(Boundary work)을 한다. 취재원을 착취하지 않고, 소수자나 특정그룹 혹은 특정국가와 민족을 일탈적 존재로 만들어내지 않도록 우리는 어떤 윤리의식과 직무적 안전장치를 갖고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영상저널리즘은 미학적인 측면에 경도되어 기술적으로 세련된 화면을 만들어 내는 것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찍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사용하면 되지 않는지, 생산하는 이미지들이 사람들을 타자화(othering)하고 소외시키는지 아닌지, 취재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그릇된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정치적 윤리적 성찰에 그 핵심이 있다.
남북의 관계가 개선되어 더욱 안전하고 건강한 시민사회를 경험하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의 바람일 것이다. 건강하고 민주적인 공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올바른 이미지들’을 사회에 제공하는 역할, 사람들의 직관과 상상력에 영향을 주는 직업인으로서 깊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김우철/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