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타기 전 인도네시아 여행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그러나 서점 어디에도 인도네시아 여행에 관련된 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휴양지인 발리에 관한 책만 몇 권 있을 뿐이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조차 자세한 여행 책이 여러 권 나와 있는데, 동남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인도네시아가 없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인구 2억 4천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네 명의 인도네시아인 어머니와 다섯 명의 자녀들. 다문화 가정이라 불리는 그들과 인도네시아친정 방문길을 함께 했다. 10년 가까이 한국에 살았다는 인도네시아 어머니들은 우리말이 생각보다 서투른 편이었다. 반면 쉼 없이 떠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혼혈아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한국아이들이었다. 서툰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 쓰는 어머니와 우리말로만 대화하는 아이들. 신기하게도 대화를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이들은 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인도네시아 말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일행 중 리나 이차 씨의 고향인 반둥 외곽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9년 만의 고향 방문에 리나씨는 무척 설레 보였고 어머니와 만나는 순간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리나씨의 아들 규호는 처음 보는 외할머니의 포옹이 어색한지 자꾸 외할머니의 팔을 뿌리쳤다. 인도네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이모와 외삼촌. 하지만 규호의 입에서는 오직 한국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인도네시아 말을 할 줄 한다는 것은 그렇게 내세우고 싶지 않은 아니, 감추고 싶은 능력처럼 보였다. 완벽한 한국인으로 키우기 위한 부모의 방침인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자기 방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인도네시아 혼혈이란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만일 그들의 어머니가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이어도 그런 모습을 보일까? 한국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칼 끝에 그들은 서 있었다.



1만 3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1인당 GNP가 1000불에 못 미치고 산업의 중심이 농업과 광업인 개발도상국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보다 모든 부분에서 뒤떨어져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제조업을 성장시키고 있다. 앞으로 이런 인도네시아를 상대할 때 가장 경쟁력 있는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바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될 거라 생각한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한국인이고 한국인으로 자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한국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몹쓸 편견 때문에 많은 것을 숨기고 잃을 것이 아니라 당당히 세계인으로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



며칠이 지나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몇몇 아이들이 자연스레 인도네시아어를 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아는 것이 숨길 게 아니라 대단히 유용한 능력이란 것을 깨닫고 있는 듯 했다.



주용진 SBS 영상취재팀 / creede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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