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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감독의 작품인가

 

 

 1. “습관이 이상하게 들어 시나리오를 집이나 사무실이 아닌 카페나 커피숍에서 쓴다. 영화가 개봉할 때쯤에 가보면 그 커피숍이 망해서 없어졌다.”

 

 2020년 미국 헐리우드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말한 수상 소감이다. 그는 오스카상 각본상을 수상하면서도 집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공동 수상이긴 하지만 그는 영화의 첫 작업인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자신의 아이디어를 개진하며 프로젝트를 끌고 나간다고 밝힌 셈이다. 오스카 수상 이후 이어진 인터뷰에서는 수상과는 별개로 영어와 한국어로 된 별도의 시나리오 작업이 있음을 밝혔다. 한국에서 영화의 주인이 ‘감독’ 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작년 하반기 TV 드라마에서 챔피언은 KBS 2TV에서 방영된 ‘동백꽃 필 무렵’이었다. 드라마의 기본기를 모두 갖춘 작품이자 스릴러와 휴먼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으며 최종회 시청률이 23.8%를 기록해 성공한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 드라마의 방영 초반에는 공효진, 강하늘, 혹은 옹벤저스와 같은 인물과 줄거리에 대한 기사가 넘쳤는데, 극이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극본을 쓴 ‘임상춘’ 작가에 대한 평가가 많았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스토브리그’의 화제성은 배우들이나 연출자가 아니라 ‘이신화’ 작가에 있었다.

 

 3. 1990년대까지 한국 TV의 드라마는 주로 스타 PD와 주연 배우들에 의존했다. 김종학, 황인뢰, 이진석, 윤석호, 김재형 등의 연출가들은 드라마에 자신들의 색깔을 집어넣었다. 이들은 배우를 압도하는 능력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김종학 작품이었으며, '우리들의 천국',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별은 내 가슴에'는 이진석이, '가을 동화', '겨울 연가', '여름 향기'는 윤석호, '용의 눈물', '여인천하'는 김재형이 만든 작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이 시기부터 김종학 PD는 송지나 작가가, 표민수 PD는 노희경이라는 작업 동지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연출자가 작가들의 영향력에 가려지는 일은 없었다.

 

 4. 어느 순간 편성을 좌지우지하는 작가들이 나타나 드라마 제작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일이 생겨났다. MBC는 ‘임성한’의 작품에 편성을 내주었고, SBS는 ‘김은숙’ 드라마를 배치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임성한과 김은숙은 전 세대인 김수현이 가졌던 PD를 압도하는 힘을 넘어 편성을 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거머쥐었다. 여기에 ‘싸인’과 ‘시그널’을 집필한 김은희와 두 홍자매(홍진아, 홍자람/홍정은, 홍미란)는 방송사가 아니라 드라마 제작사와 배우들의 출연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가가 드라마에서 연출자를 압도하게 되는 배경에는 제작환경의 변화가 있다. 외주 제작사가 나타나기 전까지 드라마 제작의 갑은 방송사였고, 방송사를 대리하는 연출자들은 비정규직이며 을인 작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배우들은 회사에 소속된 월급쟁이들이었다. 하지만 외주제작 제도가 생겨나고, 드라마 제작 자본이 방송사에서 제작사로 넘어가면서 연출자들은 제작 전권을 가진 주체에서 객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제작이 방송사와 제작사의 공동 작업이 되면서 연출자들은 방송사에서 둘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두 제작 주체의 힘의 균형이 제작사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일종의 파견 연출자이자 방영권과 제반 부가 권리를 회사로 가져오는 담보물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이나 연예 매체들의 관심도 드라마 제작에서 작가가 누구인지, 작가의 계약금과 배우가 누구인지에 더 쏠리고 있다. 그렇기에 드라마 연출가는 봉준호와 같은 ‘작가이자 연출자’가 될 수 없음도 자명해졌다.

 

 5. '동백꽃 필 무렵'의 1회의 첫 장면인 향미의 사체가 등장하는 시퀀스는 27컷이며, 동백이가 처음 등장하는 로케이션 시퀀스의 컷은 65개이다. 작가가 디테일하게 지시한 대본을 썼다 하더라도 수십 개의 컷을 배치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지시하는 것은 연출자인 차영훈 PD의 몫이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섬세한 배우들의 연기를 완성시키는 미장센과 연출, 편집을 볼 수 있는데, 결국 연출자가 작가와 배우들의 유명세에 가려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방종혁 / MBC    (사진)MBC방종혁 증명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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