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간과 정지된 시각
-해군 제 2함대 취재기-
부산 여중생 살인 사건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 남짓. 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평택이었다. 언론사에 입사해 뉴스를 만든 지 이제 5개월 남짓밖에 안된 수습기자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천안함 침몰 사건은 내게 시작부터 혹독한 시련을 줬다.
평택 해군 제2함대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햇볕 따뜻한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이라 고속도로는 더욱더 막혔고, 1분이라도 빨리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내 마음은 그만큼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하고 넘어가기에는 얼마나 많은 자괴감이 따르는가. 평택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이 자괴감을 다스리느라 꾀나 애를 먹은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현장에는 이보다 더 큰 자괴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조금만 더 통화했더라면…….”
길고 지루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평택 해군 제2함대 정문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이 보였고, 그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었다. 한쪽은 자식과 남편의 생사가 궁금해 안절부절 못하는 실종자 가족들. 다른 한쪽은, 이들을 누구보다 먼저 취재해 속보경쟁에서 이기려하는 취재진들, 나 역시 차에서 내리자마자 후자집단에 속하게 됐다.
함대 민원·행정 안내실 안에 있는 가족들은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 특히 눈가 주위가 심하게 부은 몇몇 분들을 보며, 밤새 얼마나 오열했는지가 감히 눈앞에 그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는지 주변 누군가를 의지한 채 겨우 텔레비전만을 응시하는 실종자의 아내, 그리고 그분을 다독이는 작은 손, 고개를 숙인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계신 실종자의 아버지, 애꿎은 담배만 계속 태우는 실종자의 숙부, 보는 내가 이렇게 가슴 아픈데, 당사자들을 얼마나 찢어지겠는가.
한참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슬픔을 느껴보려는 와중에 누군가 내 손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의 아들은 아픈 동기를 대신해 천안함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며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시는데,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잘 될 거라며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그분은 한참을 땅에 앉아 통곡하시다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카메라를 들고, 기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현장에서 돌아다니지만, 막상 그들에게 내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남편, 아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가 결국 나에게는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무력감은 부끄러움으로 승화되어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가슴은 찢어져도 내 가슴은 찢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잘 찍는 수밖에…….”
생각이 마저 정리되기 전에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군의 성의 없는 대처에 화가 난 실종자가족들이 부대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2함대 정문 게이트가 무너지고 가족들은 여세를 몰아 부대 안 강당 쪽으로 뛰어갔다. 놀란 기자들은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고, 더 놀란 군인들은 황급히 추가 병력을 불러와 가족들과 취재진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단으로 들어왔어도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에게,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다 생사도 모르게 돼 버린 실종자의 가족들에게, 총을 조준하는 군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울분이 터졌고, 나도 모르게 총을 겨누는 헌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 뒤에서 팔과 몸을 잡았고, 자연스레 총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되었다. 비참했다. 두렵고 무섭다기보다는, 기자라는 신분을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을 나라의 주적처럼 대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다행히 실종자 가족들과 취재진들이 공보장교를 몰아세워 인명피해 없이 상황은 정리됐지만 이런 참기 어려운 상황은 천안함 함장을 만나며 극에 달했다.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함장의 철면피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공보장교가 옆에서 시키는 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상황에 함장은 최선을 다했다.”라는 공허한 대답을 되풀이하는 함장을 보며, 자기 할 말만 해버린 채 줄행랑치는 함장을 보며, 이건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 생각이 내 자괴감을 깨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 절규하는 가족들의 모습들 하나하나를 내 뷰파인더에 담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어찌 보면 카메라기자로서 자격 미달일 수도 있지만, 거침없이 REC 버튼을 누르는 타사 선배들과 달리 REC 버튼에 엄지손가락만 갖다 댄 채 망설인 순간도 있었다. 그들이 왜 애절하게 아파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내가 이들을 왜 잘 찍어야 되는지 깨달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목숨을, 국가에 믿고 맡겼다가 뒤통수 맞은 가족들을 가슴으로 공감했고, 이런 그들의 슬픈 사정은 반드시 카메라를 통해야만 세상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호 / mbn 영상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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