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아들아.’
이 말을 듣고도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뉴스뿐만 아니라 여러 프로그램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런 이 말을 나는 현장에서 직접 듣고 있었다. 미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 한마저 느껴지는 가족의 목소리였다. 취재를 하고 있으면 모두들 의식하지 못한 체 눈물짓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촬영기자선배, 취재기자 모두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했다. 이런 상황에 이팩트와 상황을 담으려는 나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래도 나는 촬영기자였다. 조금이라도 더 그 모습을 모두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이번 일에 고생한 선후배님들 수고하셨단 말씀을 드리고.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11시 30분. 처음 대전에 도착했을 때 현충원은 평택과 다르게 매우 고요했다. 사람들의 발길은 보이지 않았고 주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만 선선하게 내 몸을 스치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침착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취재차량과 기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주변을 정리하던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도 점차 들려왔다.
2시. 현충문 앞으로 방송을 위한 모든 셋팅이 완료되었다. 주변으로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들었고 방송차량과 통제차량들이 여기 저기 얽혀있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지막 길을 떠나는 아들을 가슴에 묻으려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 시간, 그 곳에서 아픔을 나누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촬영기자로 현장에 선 역할이 나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작년 수습을 지내고 큰 현장의 중심에 선다는 부담은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려 했고 그런 나는 상황과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3시 10분.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며 시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유가족의 차량이 현충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을 따라온 방송차량을 시작으로 운구차량 그리고 유가족의 차량이 여러 대 그 뒤를 따랐다. 술렁이는 분위기와 취재진들의 발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발도 현장을 담고자 이리저리 움직였다. 드디어 차량에서 영정사진이 내려오고 사람들의 눈도, 나의 눈도 촉촉이 젖어갔다. 예정되었던 식이 시작하고 마지막 자리를 지키주려는 가족들의 힘없는 모습도 모두 나의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왔다. 가족들이 헌화를 하며 통곡하고 나의 카메라도 떨렸다. 나는 당시 행사장 안에 pool단으로 들어와 있었다. 큰 현장에서 처음으로 하는 pool단으로 긴장은 매우 컸다. 그러나 주변에 뛰는 선배들을 보며 나 역시 올바른 행동을 하기위해 노력했다. 나는 촬영기자다. 그 순간만큼은 선배도 후배도, 무엇도 아닌 촬영기자였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진정시키고 한 발짝 뒤에서 냉철히 볼 수 있어야 하는 촬영기자였다.
5시. 이제 마지막 가는 길 하관식이다. 짧은 시간 안에 송출을 마치고 뒤늦게 이동한 그곳에서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가는 내내 내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먼 곳까지 들려오는 가족들의 통곡은 도착하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서 보였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팠다. 왠지 가족들을 대하는 내 카메라가 미안하기까지 했다. 영현이 내려오고 가족의 얼굴을 볼 땐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나는 촬영기자다.’
나는 촬영기자다. 앞으로 수 십 번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자리를 지켜야 할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계속 힘겹게 카메라를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촬영기자인 이상 이러한 아픔과 힘듦은 숙명이다. 항상 웃고 있는 나의 선배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작은 자리에서, 술자리에서 가볍게 하는 선배의 말 한마디는 한마디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새삼 느낀다. 선배들의 가슴도 나처럼 미어졌을 것이란 것을...
민창호 / KBS 영상취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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