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5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인쇄 첨부

고(故) 안정환 선배를 추모하며

 
 
 동료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인 빈소. 차고 건조한 느낌의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영정사진. 그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왜 그랬는지, 무슨 상황에서였는지 선배는 엄지를 치켜세우고, 비현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 2017년 파업 때, 매일 보았던 그 얼굴이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춥고 바람도 매섭고 지루하리만치 길었다.
 
 선배는 그 겨울 동안 늘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생각해 보면 그게 선배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나도 같이 하고 싶어. 내가 도울게. 전력을 다해 바꿔 보자.’
 그런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차저차 선배가 파업 대열에 합류해 주었고, 실제로 큰 힘이 됐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선배에 대해 지금처럼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선배의 마음속에도 그 기억이 나와 같이 남아 있을까?
 
 파업이 끝나고 나서 선배는 처음으로 팀장이 됐다. 그 기간은 참 짧게 끝나고 말았다. 팀장 자리에 앉아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우리는 모두 담담했던 것 같다. 질병의 명칭이 주는 위압감과 공포를 선배도 나도 애써 외면한 것이리라. 나는 왠지 선배가 마지막까지 버티고, 당장에라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무슨 근거로, 그런 배짱을 부렸을까?
 
 선배도 딸 둘, 나도 딸 둘이다. 선배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지점이다. 워낙 말수가 적어 선배로부터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다. 오히려 내 딸 이야기를 선배에게 많이 했다. 그때마다 선배는 지긋이 웃으면서 마지막에 그저 짤막한 코멘트를 남길 뿐이었다. 선배가 얼마나 두 딸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 형수를 아끼는지 느낄 수 있는 코멘트를.
 
 이따금 선배와 술잔을 기울였다. 선배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 후배들에게는 왠지 엄격해 보이는 사람, 다가가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와 참으로 편안하고 진솔한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언론사에 들어와 온갖 불의와 싸우면서 믿을 수 있는 동료, 선배와 솔직하고 격의 없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선배와 마주 앉았던 그 자리가 몹시 그립다.
 
 선배를 보내고 나니 남는 후회란 더 자주 밥을 먹지 못한 것, 더 자주 술잔에 술을 부어주지 못한 것, 더 깊은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지 못한 것, 그런 소소한 것들뿐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을테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선배의 눈을 보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
 
 10월 7일 아침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7시 반. 이른 시간에도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회사 신관 로비에 모였다. 선배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아침 일찍 추모식에 참석한 것이다. 짧은 추도 예식이 끝나고, 신관 3층 보도영상 팻말이 붙은 문을 지나 좁다란 복도를 걸어간 끝에 나온 아카이브실. 선배가 마지막 며칠을 머문 장소다. 영정사진을 안은 유가족은 아카이브실을 거쳐 4층 특집팀 사무실로 향했다. 선배가 암 선고를 받고 나서 몇 개월간 앉아 있었던 팀장 책상. 형수가 그 자리에 서서 한없이 흐느껴 운다. 마치 그 자리에 선배가 앉아 있었을 때 겪었던 일을 자신은 훤히 알고 있다는 듯 펑펑 눈물을 쏟는다. 오열하는 형수를 바라보며 나 역시 거기 앉아 있던 선배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선배가 조금 먼저 정상에 올랐을 뿐이다. 나도 역시 삶의 길을 묵묵히 걷다가 언젠가 선배처럼 정상에 이르리라.
 
 선배가 떠난 후, 내 기억 속에 남은 선배는 싸우고 있고, 승리에 감격하고 있고, 마지막엔 그 승리의 여운을 조금이나마 공유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선배의 삶에, (그땐 몰랐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저벅저벅 선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던 그 시점에 그런 승리, 작지만 감격스러운 사건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어 아찔하다.
 
 영정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높이 치켜세우는 선배 모습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그날 속엔 나도 있었고, 환히 웃고 있던 선배도 있었던 것이다. 반년 가까이 급여를 받지 못하며 국정농단, 사법농단, 언론농단 세력과 맞서 싸우고, 개혁을 부르짖었던 시간은 순수하고 또 정의로웠다. 힘겹고 고독한 길을 걸어간 이상 우린 싸움 이전에 이미 승리자들이었다. 그 기억 속에 선배가 영원히 남으리라.
 
 남은 가족들께 깊은 슬픔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전해 드린다. 
 
 

김정은 / 편집장    f17df408ecf854986c366387ef590189.jpg

 


  1. ‘제31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시상식’ 축사

    존경하는 방송카메라기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박원순 서울시장입니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창립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귀한 자리의 주인공이신 제31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수상자 여러분께도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냅니다. ...
    Date2018.04.05 Views514
    Read More
  2. 영상 저널리즘의 위기와 기회

    영상 저널리즘의 위기와 기회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생존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베인즈 뉴스 픽쳐스(Bain’s News Picture)를 통해 공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생존자 중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었고, 그...
    Date2018.10.19 Views504
    Read More
  3. 수중 촬영에서 피사체를 쉽게 찍을 수 없을까

    안녕하세요~ 스쿠버라이프 김원국 강사입니다. 아! 여기서는 영화사 숨비 촬영감독 김원국입니다.~^^ 이번에 한국방송 카메라기자협회 TV뉴스 촬영교육을 다녀와서 저 또한 좀 더 많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TV뉴스를 이끌어가는 여러분들과 함께 ...
    Date2017.11.04 Views503
    Read More
  4. MNG가 바꿔놓은 풍경

    MNG가 바꿔놓은 풍경 2017년 8월. ‘혹시 모르니까.’ 전국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던 대한민국보다 조금 더 기온이 높은 필리핀으로 ARF(아세안 지역 포럼)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혹시 모르니까’ 하는 생각으로 MNG 장비를 챙겼다. 데...
    Date2019.09.09 Views501
    Read More
  5. 저작자의 성명표시권, 실효적으로 관리ㆍ개선되어야 마땅

    저작자의 성명표시권, 실효적으로 관리ㆍ개선되어야 마땅 ▲ 이호흥 호원대 초빙교수 / (사)한국저작권법학회 명예회장 우리나라 저작권법 제12조 제1항은“ 저작자는 저작물의 원본이나 그 복제물에 또는 저작물의 공표 매체에 그의 실명 또는 이명(異名)을 표...
    Date2020.07.17 Views492
    Read More
  6. 가슴이 뛰는 일, 한국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가슴이 뛰는 일, 한국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지난 2019년 6월 12일 정부 중앙 청사를 급습하려는 시위대와 대치 중인 홍콩 경찰(사진=필자) ▲지난 2019년 7월 1일, 매년 열리는 홍콩 반환 22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날, 홍콩 시민 수십만 명이 범죄인 인도법 반...
    Date2021.03.10 Views484
    Read More
  7. 클라우드시대의 영상기자

    클라우드시대의 영상기자 보도영상 관련 기술은 계속 발전해왔다. 화질은 SD에서 HD로, 기록 매체는 테이프에서 메모리로 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상취재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영상기자의 역할까지 바꾼 것은 아니다. 하지만 MNG는 기존의 위성 장비를...
    Date2020.03.11 Views477
    Read More
  8. 피의자 신상공개 결정의 고뇌와 함의

    피의자 신상공개 결정의 고뇌와 함의 서울지방경찰청은 3월 24일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을 공개했다. 4월 16일에는 조주빈의 공범으로 구속된 피의자 강훈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성명과 나이가 공개되었다. 얼굴은 다음 날 피의자를 송치할 ...
    Date2020.05.11 Views469
    Read More
  9. [줌인] 고(故) 안정환 선배를 추모하며

    고(故) 안정환 선배를 추모하며 동료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인 빈소. 차고 건조한 느낌의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영정사진. 그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왜 그랬는지, 무슨 상황에서였는지 선배는 엄지를 치켜세우고, 비현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
    Date2019.11.06 Views456
    Read More
  10. [뉴스VIEW] ‘공공기록’으로서 보도영상의 가치, 영상기자가 끌어올려야 할 때

    [뉴스VIEW] ‘공공기록’으로서 보도영상의 가치, 영상기자가 끌어올려야 할 때 최근 방송·영상 산업 분야 안팎에서 ‘아카이브(우리말로는 ’기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주요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자사 영상자료를 비교적 높은 비중으로 편집하여 이른바 ‘회...
    Date2022.08.31 Views453
    Read More
  11. [줌인] 다름과 깊이가 있는 뉴스

    다름과 깊이가 있는 뉴스 나열 뉴스는 독재 시대의 욕망을 반영한다. 독재 사회에서 뉴스는 특권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특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뉴스는 깊이 들어갈 수 없다. 독재 사회에서 뉴스는 깊이 들어가는 순간 그들(언론)이 가진 특권을 잃는다. 역...
    Date2019.07.02 Views451
    Read More
  12. 북⋅미정상회담 이후 예상 시나리오

    북⋅미정상회담 이후 예상 시나리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정상회담이 열렸다.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담에 대한 희망적 관측과 더불어 과거 정권교체 대상이었던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거의...
    Date2018.07.04 Views441
    Read More
  13. 무분별한 운영, 드론의 위험성

    무분별한 운영, 드론의 위험성 ▲ 지난 7월 18일 한 방송사에서 대구 스크린골프장 화재현장을 감식하고 있는 소방대원의 가까이에 드론을 날리고 있는 장면 4차 산업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론은 손쉽게 온·오프라인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소방...
    Date2019.09.09 Views439
    Read More
  14. 호모 비디오쿠스는 진화 중

    호모 비디오쿠스는 진화 중 내가 KBS에 입사한 2006년. KBS 9시 뉴스 시청률은 보통 20% 초중반, 잘 나올 땐 30%가 넘었다. 2019년 현재, 시청률은 반 토막이 났다. 다행인 것일까? 아직 시청률은 1위를 고수하고 있으니. 우리가 즐겨보는 네이버뉴스에서 KBS...
    Date2019.09.09 Views421
    Read More
  15.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다양한 경험, 재치 그리고 순발력 뉴미디어 콘텐츠 만드는 데 밑거름 ▲KBS대전뉴미디어팀에서근무하고있는필자 지난 2월 KBS 대전총국 내 새로운 조직인 디지털 관련 부서가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갈망해 왔지, 사실 디지털 분야는 그...
    Date2021.01.08 Views420
    Read More
  16. 영상기자가 가져온 내 삶의 변화

    영상기자가 가져온 내 삶의 변화 사람은 한 치 앞일도 알 수가 없다. 불과 작년만 해도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영상기자라는 직업 명사는 불현듯 내게 왔다. 영상기자가 된 후 세 번째 봄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이에게는 저마다 인생 전환점이 있을 ...
    Date2020.01.09 Views419
    Read More
  17. 아리랑 ‘영상기자’만이 갖는 독특한 영역

    아리랑 ‘영상기자’만이 갖는 독특한 영역 ▲ 아리랑국제방송 스튜디오 ‘아리랑국제방송’은 국내에서 ‘국제방송’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방송 중인 거의 유일한 채널이다. 어느덧 개국한 지 20여년이 흘렀다. 긴 세월이 말...
    Date2019.07.02 Views416
    Read More
  18. 새해를 맞아 다짐하는 세 가지

    새해를 맞아 다짐하는 세 가지 다사다망(多事多忙). 2018년 직장인들 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일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쁨’을 뜻한다. 보름도 채 남지 않은 나의 2018년을 되돌아봤 다. 1월 평창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4.27 남북정상회담,...
    Date2019.01.03 Views411
    Read More
  19. 이상한 출장

    이상한 출장 “카메라 기자 인생 30년에 가장 굴욕적이었어.” “오죽했으면 내가 출장기간에 억울한 부분을 하루하루 메모를 해놨다니까.” “이런 출장 인지도 모르고 갔지.” “갔다 와서 엄청 싸우고 다신 안 간다고 ...
    Date2019.07.02 Views406
    Read More
  20. K리그가 EPL보다 재미있는 3가지 이유

    K리그가 EPL보다 재미있는 3가지 이유 ▲ 지난해 11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원정석에서 아들과 함께 축구 좋아하시나요? 해외축구는 EPL, 국내축구는 국가대표팀 보신다고요? 맞습니다. 역시 축구는 EPL이죠. 그곳에서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의 최고의 기...
    Date2020.09.15 Views404
    Read More
  21.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마스크가 바꾼 2020년 취재현장 포스트 코로나 시대, 취재현장 보도 윤리·취재 방식도 변화 ▲지난 12월 21일 가족 새해 소망을 듣기 위해 방송사 취재진이 마이크 연장봉을 이용해 마스크 쓴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종로 경찰서 앞에...
    Date2021.01.08 Views40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