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택시운전사> 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되었다.
그 해 광주를 기억하며
개봉 2주 만에 9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택시운전사>는 평일에도 약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첫 천만 영화가 되었다.
개봉 전 ‘택시운전사’의 흥행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영화는 가슴 아픈 현대사를 목격자의
눈으로 그려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송강호와 유해진의 연기력과 위르겐힌츠페터 역을 맡은 토마스 크레취만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 있었다.
곳곳에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었고 공설 운동장에는 탱크와 장갑차도 보였다.
광주에 살던 이종사촌 형은 “북한의 무장공비가 광주에 침입해 사람들을 살육하고 다닌다.”고 했다.
“여자의 가슴을 도려내 나무에 걸어놓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인다.”고 했다. 주위 어른들은 그런 말을 하는 이종사촌형을 나무랐다.
어린마음에 사촌형과 나는 뒷산에 총알을 주우러 가기도 했다.
물론 총알이 있을 리 없었다. 그곳은 경기도 광주였기 때문이다.
그 광주와 그 광주가 다르다는 것을 몇 년이 흐른 나중에 알았다.
하지만 민심은 그곳이 어디든 흉흉했고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계엄이 선포된 지역의 시내에서 군인들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주인공의 절규가 진실이었건만 어린 나의 눈에는 TV 속 광주 사람들이 폭도로 보였다.
고교시절에 역사속의 광주를 갔다. 그때만에도 올림픽을 방해하고 데모하는 형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설이었다. 80년대 5월의 광주는 시내 전체가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에 대해 시민들의 저항이 지속되고 있었고 당시의 사진이 거리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때 몰래 유통되고 있던... 그가 촬영한... 영상을 봤다.
바로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광주의 진실이었다.
어린 내게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한편으로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조금씩 사실과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목격자를 십여년이 흘러 만나게 되었다.
<택시운전사>영화에서도 나온 장면이지만 그가 송건호 언론상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MBC 보도영상연구회에서는 카메라기자들과의 만남을 추진했고 카메라기자협회가 후원해 2003년 12월5일 MBC에서 간담회를 개최했다.
많은 이들은 80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방송은 못했어도 최소한의 현장 기록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광주에 대한 기록은 계엄군의 총칼에 한국의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광주MBC는 시민군에 의해 불바다가 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후 2005년 5.18 재단의 초청으로 그 가 한국에 다시 왔다.
MBC 나준영 기자의 공적요청을 곽재우 카메라기자협회장이 받아들여, 카메라기자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때의 빚을 갚는 의미로 그에게 카메라기자상 특별상을 시상했다.
그때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25년이 지난 2005년 5월19일이었다.
위르겐힌츠페터 기자는 “한국의 카메라기자들에게 이런 상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영광이라는 그의 말에 한없이 작아졌다. 당시 참석했던 방송사 데스크들은 진실을 기록하지 못한 원죄와 방송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참회했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80년 5월 광주에서 촬영하던 자신의 모습이 담긴 시상식 현수막을 독일로 갖고 가고 싶어 할 만큼 한국의 카메라기자들이 주는 상에 의미를 두었다.
영화<택시운전사>로 다시 그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기록할 영상을 대신해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해서 져야 했던 한 파란 눈의 외국인이 기록한 역사를 보며 그날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다.”
우리 카메라 기자들이 ‘518에 대한 원죄’를 한 번 더 반성하고, ‘역사의 기록자’로서 우리의 모습을 재정립하자던 어느 멋진 MBC의 X 등급 카메라기자 선배와 파란 눈의 목격자가 떠오른다.
이정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