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상처를 안고
▲ 한강에서 구조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시커멓게 변한 한강은 점점 수위를 높이며 주변 공원들을 삼켜나갔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폭우에 취약시설이 붕괴되고 저지대가 침수되는 사고가 이어졌다.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팔당은 견디다 못해 수문을 열었다. 커다란 입에서 쉴 새 없이 흙탕물이 뿜어져 나왔다. 방류를 시작한 댐과 침수 위험에 노출된 주변 마을... .
취재를 위해 차에 올라탔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강을 거슬러 한참을 올랐다. 거센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다. 늘 보던 한강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원의 농구 골대엔 수림만 겨우 보였다. 비가 얼마나 내린 걸까? 겁이 덜컥 났다.
땀이 난 손으로 카메라를 부여잡고 2시간쯤 달려 댐에 이르자 응급구조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얼른 내려 구조대원에게 물었다. 그는 별 말없이 손가락을 쭉 뻗어 시커먼 강가 수풀 쪽을 가리켰다. ‘등’이었다. 사람의 등. 발뒤꿈치부터 정수리까지 모든 세포가 빳빳하게 서는 기분이었다.
물 위에 둥둥 뜬 등은 중년 남자의 시신이었다. 곧이어 또 한 대의 구급차량이 도착하고 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황급히 강가로 갔다. 댐에서 가까운 유속이 빠른 상류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구조대원들까지 전부 휩쓸려 내려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시신 수습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물을 잔뜩 머금은 시신은 무겁고 미끄럽다고 했다. 구조대원들이 로프로 시신의 허리와 팔다리를 감아서 뭍으로 간신히 끌어올렸다. 거대한 나무줄기를 당겨 올리듯 구조대원 대여섯 명이 맞잡고 안간힘을 썼다.
뭍으로 올라온 시신은 익사 후 시간이 꽤 흐른 듯 보였다. 시신은 사후 경직으로 인해 팔을 앞으로 곧게 뻗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에 빠질 당시에 입고 있던 반팔 상의와 짧은 바지 그리고 샌들까지 그대로였다. 마네킹처럼 핏기없는 새하얀 팔다리가 옷가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카메라 영상으로 담기는 했지만, 뉴스로는 내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과학수사대의 간단한 현장 부검과 사망 판정 후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졌다. 경찰은 며칠 전 가평에서 불어난 강물에 실족으로 인해 휩쓸려 실종된 50대 남성이라고 추정했다. 구조에서 시신 수습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본 장면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남았다. 주변에 최초 목격자와 경찰을 인터뷰 했다. 어느 순간 발을 떼려는데 카메라에 얹은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부지불식 간에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다.
차를 돌려 서둘러 서울로 복귀하는데 허탈감이 밀려왔다. 비에 젖은 옷가지는 금세 말랐지만, 현장의 끔찍한 기억이 한동안 머릿속을 헤집으며 나를 괴롭혔다.
이듬해 여름, 결혼을 앞두고 와이프와 신혼집 청소를 하기로 했다. 청소도구를 사서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 먼저 아파트로 향했다. 주차장 출구 쪽 화단 앞에 경찰들과 주민 몇몇이 모여 있었다. 슬쩍 끼어들어 살펴보니 투신 현장이었다. 아파트 10층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몸을 던진 것이다. 추락하면서 부딪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시신은 화단에 쓰러져 있었다. 1년 전 팔당에서 본 시신이 생각났다. 트라우마 탓인지 (카메라도 쥐고 있지 않은) 오른손이 또 다시 굳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주변 상황을 찍고 최초 발견자와 평소 가깝게 지냈다던 지인들을 인터뷰 했다. 휴대전화기를 쥔 손이 계속 떨렸다. 투신자는 통장으로 활약할 만큼 평소 동네에서도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근래 들어 급작스럽게 우울증을 호소했다고 했다. 아마도 끝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듯했다.
당직자에게 내용을 보고하고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투신 사고 취재가 처음은 아니다. 아주 끔찍한 사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도 사고 직후에 모든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을 몰랐다.
그곳에서 2년을 살면서 그 화단을 지날 때마다 과거가 소환되었다. 팔당댐 익사사고와 투신사고와 겹쳐져 투영됐다. ‘그냥 지 나칠 걸, 못 본 척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을......’ 끔찍했던 당시 기억이 떠오를 때면 후회도 했다.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가 때마다 화단을 빙 돌아서 가기도 했다.
‘트라우마’는 의학적 용어로 큰 범주의 ‘외상’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트라우마를 ‘정신적 외상’, 즉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으로 규정짓는다. 강렬한 경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내상을 입는 것.
참혹한 사건 현장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영상기자들은 늘 ‘트라우마’ 가운데 살아간다. 비슷한 취재 환경에 놓이거나, 훗날 사건 현장을 다시 지날 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런저런 기억의 퍼즐들로 힘겨워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그라져 갔을 생명들. 그들을 제때 도와주지 못한 도의적 책임, 혹은 죄의식. 눈을 감기엔 너무 이른, 꿈과 미래가 창창한 가녀리고 여린 생명들, 그들을 떠나 보내는 슬픔. 남겨진 가족들의 찢어지는 고통....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질 줄 알았던 기억 조각들은 가슴 깊숙이 박혀서 때가 되면 또다시 아물지 않고 욱신거린다. 영상기자들 중엔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들도 다수 있다. 현장을 거부하거나 마다할 수가 없어 생긴 상처들 때문이다. 영상기자들의 직업적 숙명이기도 하다. 기자는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하며 현장에 대한 목격자로서 기민해야 한다고 배웠다. 현장을 거치며 생긴 마음의 상처들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씨앗이라고 생각하라고. 그 씨앗이 지금은 싹을 틔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힘겹지만, 분명 밝은 미래로 아름답게 꽃 피워 보답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조각조각 쓰라린 가슴 한편으로 우리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심는다.
김원 / MB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