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팀은 서울대학병원 법의학센터로 향했다.
오늘 취재는 6.25전쟁 중 발생한 유골이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10년째 서울대 병원에 방치되어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다.
법의학센터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부검 실 팻말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몸이 서서히 움츠려들었다. 부검 실 내부는 바닥과 벽이 온통 하얀 타일로 덮어져있었고 부검 실 중앙에는 스텐레이스로 된 2개의 부검 대가 썰렁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부검 실이라는 장소를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너무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검 대 위에는 작은 배수 구멍이 수도 없이 뚫어져 있었고 아래는 군데군데 여러 개의 수도꼭지가 달려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부검 대 위의 조명등과 바닥의 촬영기구들이 하얗게 먼지를 뒤 집어 쓰고 있었다. 부검 실 옆방에는 내용물을 알 수없는 수많은 유리병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대략은 짐작이 가지만 자세히 들여다 볼 용기는 차마 나질 않았다. 우리가 취재할 장소는 바로 부검 실 옆방에 있는 유골 안치실이다.
6.25 전쟁 당시 금정굴(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소재) 사건으로 발생한 유골170여기가 이곳 10평 미만의 좁은 방에 빼곡히 쌓여있었다. 금정 골 유해는 철재 4단 선반에 보관되어있는데, 맨 위에 머리 부분을 시작으로 아래로 골반, 팔, 다리뼈 순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임시 안치실은 항온, 항습 장치가 없는 일반 실험실이어서 유해 보존 상태가 열악해 보였다. 이곳을 관리하는 L 교수는 유해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는 요즈음처럼 DNA 검사가 일반화 되지를 못하였고, 현재까지 이런 식으로 유해가 관리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취재팀에 토로했다.
금정굴 사건은 지난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한 달여에 걸쳐 고양·파주 일대에서 북한군 점령 하 인민위원회 등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아래 1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경찰과 우익단체들에 의해 불법 연행된 후, 고양 금정 굴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이다.
희생자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들과 부역혐의와 무관한 주민들이고 희생자 중에는 10대가 8명, 여성이 7명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금정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정부 조직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위)가 지난 2005년 발족했다.
진실위는 "비록 희생자 가운데 일부가 부역자나 부역혐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관련 법령 및 규정에 따른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총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설명했다.
진실위는 재발방지를 위해 제반 법률 개정과 경찰 대상 인권교육, 역사관 건립 등을 추진할 것과 유해 봉안, 적절한 위령시설 설치 등 화해와 위령사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위의 이러한 권고가 작년 2007년에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진실위가 내년 2009년이면 위원회 활동임기가 만료되고 조직이 와해될 처지에 놓이게 되어 유가족들을 더욱 애타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을 깨끗하게 매듭지어야할 해당 정부부처의 무관심이 금정 굴 사건 영혼들을 구천에 맴돌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안치실은 마치 의대생을 위한 유골 전시장 같았다. 그동안 여러 취재 현장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유골을 촬영해보기는 처음이다.
갑자기 ‘킬링필드’의 영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촬영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촬영할 때 피사체를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파인더를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덜 긴장 된다. 왜냐하면 파인더가 사물을 무채색으로 바꾸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L 교수 인터뷰를 준비했다. 막 인터뷰를 시작하려던 순간 L 교수는 “ 안치소에서 인터뷰하기는 처음입니다. 혹시 유골을 배경으로 한 인터뷰 장면이 편집과정에서 빠질지도 몰라요.” 라고 한다.
그렇다!
부검 실이라는 공포의 현장에서 놀라 도망쳤던 나의 도덕적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무리 현장감을 강조하는 카메라기자지만 유골을 배경으로 한 인터뷰는 아무래도 심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안치실 밖으로 나와 다시 인터뷰를 했다. 하마터면 애써 녹화한 인터뷰가 사장될 뻔하였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부검 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추석을 며칠 앞둔 유족들이 이곳에서 차례를 지내기 위해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마치 친척집을 방문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검 실을 들어선다. 유가족인 M 할머니는 가져온 음식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검 대위에 올려놓고 태연히 부검 실 세척 대에서 과일을 씻기 시작한다.
“남들은 추석이라고 멋진 장소에서 차례 지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라며 할머니가 취재팀에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좁은 안치실에서 즉석 차례 상이 차려졌다. 사과, 배, 막걸리 등으로 소박하게 꾸며진 차례 상이 준비되자 유족들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다. 차례를 마친 유족들은 막걸리로 음복을 하고, 제사 술을 유골 주변 이곳저곳에 뿌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 L 교수로부터 최근 유해 보존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는 얘기를 들은 후라, 항온, 항습 장치가 없는 안치실에서 술을 뿌리는 것도 유해 보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M 할머니와 유족들은 우리 취재팀에게도 음복을 권하고 차례 지낸 떡과 과일을 나누어준다. 나는 단지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부검 실을 나왔다. 취재차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 따르던 L 기자가 “선배! 유가족 분들이 먹으라고 준 음식 이예요”라며 양손 가득 음식물을 들고 있었다.
유가족들이 처음 이곳 부검 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기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란 모진 세월이 그들의 감각기관 마저 이처럼 무디게 만들어 놓았다. 부검 실이 주는 혐오감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혐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과거 50년 동안 부역자라는 멍에에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온 유족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부모, 형제가 쓰러져갈 때, 흘렸던 눈물은 이제 더 흘릴 눈물조차 없이 말라버렸다.
이제 남은 유족들의 수도 얼마 되지 않고, 워낙 고령인지라 그들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이제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다. 금정굴 사건이 더 이상 그들만의 아픔과 상처로 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취재하는 줄곳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화방송 보도국 영상취재2팀 서영호
* 위의 내용은 ‘한 맺힌 차례 상’ 이란 제목으로 지난 9월 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방송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