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콘텐츠 빠진 새로운 판짜기
지난 정부 출범의 화두는 ‘창조경제’였다. 결국 창조경제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념정의조차 제시되지 못한 채 탄핵되어버린 느낌이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장미대선 국면으로 급변한 현재는 창조경제의 자리를 ‘제4차 산업혁명’이 대신하고 있고, 미래창조과학부를 포함한 정부 조직 개편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4차 산업혁명은 무엇이고, 실질적인 추진력을 가진 조직개편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제기의 핵심은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 추동력의 실체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흔히들 ‘ICT’, ‘CPND’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여기서 영문자 'C'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일 때도 있고, 콘텐츠(contents)를 의미할 때도 있다. 과연 제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 속에서 콘텐츠나 커뮤니케이션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C’는 콘텐츠와 커뮤니케이션 중에서 무엇을 강조하는 개념일까? 이러한 질문의 가치는 우리 방송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CATV, 모바일, IPTV, HDTV, 3DTV 등의 개념이 과연 콘텐츠를 내포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중요성에서 기인한다.
과거의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기술선도의 산업 육성이 자연스럽게 콘텐츠산업 자체의 경쟁력이라고 당연하게 간주하고 있었다. 3D기술이 가능해지면 소비자들은 3D콘텐츠를 시청하기 위해서 3DTV를 구매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기술이 있다고 해서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성공한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화질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한 기술 개발과 제작방식에서의 지체현상은 제작비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책적 고민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눈부신 기술 발전이 정책전문가부터 일반 시청자들까지 모두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도 마치 기술선도 정책이 당연히 콘텐츠마저도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선후가 뒤섞인 상태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이며, 콘텐츠산업의 속성에 대한 무지가 초래한 자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콘텐츠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술과 콘텐츠는 양립하는 가치이지, 새로운 기술을 육성하는 것이 곧 콘텐츠산업을 육성하는 유일한 전략인 것은 아니다.
콘텐츠의 가치는 고유의 영역이다. ‘미녀와 야수’는 동화로서도, 만화로서도, 2D나 3D 애니메이션으로도, 실사에서까지도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스토리 가치가 있는 콘텐츠에 적절한 기술이 가미되는 것이 콘텐츠산업의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VR기술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기도 하겠지만, VR기술을 활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기존의 스토리가 VR콘텐츠산업의 핵심 동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선도의 콘텐츠산업 육성에도 노력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투자가치가 있는 원형스토리를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콘텐츠산업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원형스토리가 빈약한 것이 우리 콘텐츠산업의 가장 큰 약점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에도 원형스토리에 대한 고민은 없고 ‘기술’이나 ‘정보’와 같은 개념이 토대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형스토리의 빈곤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 콘텐츠산업의 상대적 열위는 극복될 가능성이 낮다. 정부조직 개편의 방향에서도 콘텐츠의 가장 기본이 되는 토대 역량을 더욱 탄탄히 구축할 수 있는 부서에 집중하고, 기술 영역과는 차별화되어 있는 원형스토리를 장기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기술 선도와 스토리 선도는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 동렬(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